'모리스디페렌테'(다른 삶) 02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일하게 된 동네, 동티모르 로스팔로스에 와서 살면서, 다짐한 것들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능한 현지의 음식들로 건강하게 먹어야지라는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 막상 가보니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 그냥 자연스럽게 (반강제/비자발적으로) 현지 재료 위주로 사 먹게 되었다. 시장과 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주로 다 제철의 산지 채소와 과일 위주였다. 너무 건강하고, 나도 모르게 나의 목표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기쁜 것은 한 이틀? 3일? 어허허허허허...
서울에서 누리던 식생활 대비, 무척 심심하고 변화가 없을뿐더러, 너무나 건강한 재료들에 왠지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 (몸은 건강해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배달음식, 야식, 간편식, 분식, 맛집 음식 등등... 이런저런 온갖 다양한 먹고 싶은 것들이, 정말이지 비유가 아니라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환시도 몇 번 경험했다 ㅠ.ㅠ
그러나 많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식습관 역시 매일의 습관인지라, 어떻게 하다 보면 또 적응이 되고, 나름 즐기게 된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있는 재료들로 (나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온갖 창의성을 발휘해서 별별 걸 해 먹는 데도 재미가 들렸다.
하지만, 로팔에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돼지고기나 해물에 대한 갈증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로스팔로스에 있다 보면 사방천지에 돌아다니는 것이 유기농 돼지와 닭인데 (시장 가는 길에도, 학교 가는 길에도 돼지와 닭들은 아주 태연하게 사람들과 함께 길을 다닌다) 도대체 이들은 왜 슈퍼마켓이나 시장에 팔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몇 달이 지나서야 슬슬 풀렸다.
일단 첫 번째로 그 수 자체가 많지 않다.
워낙 보이는 곳에서 항상 돌아다니다 보니, 게다가 나처럼 이방인인 경우 “돼지가 그냥 길에 돌아다니는 것”이 서울에서 보던 풍경이 아닌 탓에, “많아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그 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닭이고 돼지고 축사를 따로 만들어서 키우는 경우가 많지 않은 탓에, 실종 및 도난의 경우가 종종 있고 생산성이 높지 않다.
높을 수가 없다.
좋은 공기를 마시고, 무언가 인공적인 사료나 항생제, 촉진제 등은 절대 없어서 못 맞고, (사람이 버리는 쓰레기는 좀 주워 먹을 수 있겠지만) 그냥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키워지기 때문에 유기농 토종 축산물임은 분명하지만, 성장 속도와 개체수가 높을 수가 없다.
그냥 원래 낳는 수대로 새끼를 낳고, 원래 속도대로 자란다.
두 번째로 이 많지 않은 개체수는 미처 시장에 나오기 전 나름대로 소비가 알아서 되는 편이다.
가족들 간의 (가족들의 범위는 보통 우리나라의 직계가족보다 범위가 훨씬 더 넓다 - 과장 조금 보태면, '사돈의 팔촌'도 가족! ) 경조사에 서로서로 주고받는 경우가 많고, 마을 잔치며, 전통 의식 등을 할 때 돼지는 꼭 필수다.
돼지가 필요한 경우에는, 마을 내에서 알아서 사고팔기가 된다. 굳이 시장을 거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별로 수가 많지도 않은 데다가, 알아서 다 자체적으로 소비가 되기 때문에 미처 시장에 나올 정도의 수는 없다.라는 것이 내가 나름 내린 결론.
그래도 닭은 사육장을 좀 만들기도 한다던가 하고, 아무래도 사육 소요 시간이 더 적기 때문인지 시장에 나오기도 한다. 깃털과 벼슬 다 달려있고, 아직 꼬꼬댁하면서 살아있는 멀쩡한 생닭으로 나온다. 닭을 산다고 해도, 먹기 위해서는 잡고 다듬는 법을 익혀야 한다… 돼지는 정말 본 적이 없다. 수도인 딜리에는 대형 슈퍼마켓이 있고, 여기에는 수입산 냉동 돼지고기가 항상 있다. (2017년 5월 기준, 로스팔로스에는 수입 냉동닭만 팔지, 냉동 돼지고기는 파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항상 돼지고기가 너무 먹고 싶었던 차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어느 집에 뒷다리인지 앞다리인지 두 개를 걸어 놓은 것을 보고 한 번 사 먹은 적이 있다.
로스팔로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돼지고기 (라기 보단 돼지다리!)를 봤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아마 그 집에서 돼지 잡고 남은 것을 걸어놓은 것인 듯했다.
털도 아직 그대로고, 발굽과 발톱도 그대로인 정말 돼. 지. 다. 리.
같이 있던 현지인 직원분이 고기가 좋다고 너무 확신에 차서 말했기도 했고, 맨날 길에서 들판에서 보는 운동을 열심히 하는 티모르 유기농 토종돼지 맛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길래 4달러를 주고 일단 한쪽을 샀다.
사기는 사 왔는데, 일단 꺼내놓고 보니 너무 “다리”다. 옆집 랜디네서 기르는 새끼돼지 봉팔이의 엄마에서 그대로 잘라낸 것 같은 그 다리가 턱 하니 도마 옆에 있으니 좀 엄두가 안 난다.
닭은 어떻게 다듬어 봤는데 돼지는 일단 사이즈가 너무 크네...
난감하게 쳐다보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비닐장갑을 끼고 단단히 힘을 주어 발목을 잡은 후, 우선 넓적다리 부분 해체 시작. 돼지껍질이 너무 질겨 일단 칼로, 가위로 낑낑대면서 좀 벗겨낸 후 살을 발라냈다. 역시 운동을 많이 한 돼지라 그런지 살이 질기다.
푸줏간 칼이 있으면 어떻게든 척척 잘라낼 텐데, 우리 집 안 드는 일반 주방칼로 30분 정도 끙끙대다가 뭔가 질질 발라내긴 발라냈는데 영 그렇다. 종아리는 도저히 발라낼 수가 없어서 “그래, 어차피 저긴 살도 없어”라고 합리화하며 정리했다.
살을 발라내고 나니 요리할 기운이 없다. 뭔가 야생의 냄새가 엄청 날 것 같은 느낌의 살아있는 돼지고기여서 집에 있는 오래된 레드와인에 푹 담가놓고, 마늘/고추장/양파/후추 양념을 그득그득했다. 아무리 봐도 부위는 장조림 부위인데, 양념은 두루치기 양념의 약간 언밸런스한 요리가 되었지만, 나를 비롯한 한국인 3명이 로스팔로스에서 돼지고기 먹을 기회가 별로 없다. 이래저래 한 그릇을 비우긴 했다.
그때 이후로도, 돼지는 영 잘 먹을 기회가 없다.
가끔씩 마을 잔치에 초대받아서 갈 때나, 아니면 직원 회식할 때 정도.
회식 때는 살아있는 돼지를 한 마리씩 사서 먹는다.
현지인 직원 아저씨들께서 마을에서 당일 혹은 전날 공수한 6개월이 안 된 적당한 작은 크기의 돼지를 사 오시면, 잡고, 껍질을 벗기고, 해체를 하는 밑 작업을 한다. 이후 불을 피워 굽기도 하고, 커다란 속 빈 나무둥치를 잘라 그 안에 넣어 찌기도 하고, 대나무 안에 양념과 쌀을 함께 넣어 요리하기도 한다.
깨끗하게 다듬고 잘라 요리할 수 있는 상태로 슈퍼마켓에서 파는 돼지고기가 아닌, 살아있는 돼지를 사서 잡는 것부터 요리까지 하는 과정에 시간을 고스란히 쓰다 보면 왠지 겸허해진다.
아, 고기가 쉽게 먹는 게 절대 아니구나~ 하는 생각.
정의로운 먹거리, 동물권을 존중하는 먹거리, 공장식 상업 축산의 폐해, 로컬 생산과 소비 등등을 복잡하게 떠올리지 않아도, 그저 아주 단순하게 "생명이 고기가 되고, 그게 내 입에 들어오고 소화되는 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덤덤하게 느끼게 된다.
그런 순간들 때문인지, 아니면 돼지고기를 덜 먹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줄게 된 것인지, 아니면 둘 다 인지, 이제는 한국에 들어와도 돼지고기가 그렇게 많이 당기지 않거니와, 예전처럼 막 너무 먹고 싶거나 하지도 않는다.
가끔씩은 기름이 좔좔 흐르는 삼겹살을 치이익 불판에 올려, 묵은지 김치를 같이 구워서 먹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군침이 돌기도 하지만, 그리고 여전히 돼지고기는 맛있고 식욕도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전 한국에 살 때보다는 훨씬 덜 먹게 되고, 그렇게 덜 먹는 것이 자연스럽게 편안하다. 자연스럽게 편해지다 보니깐, 식탐 혹은 "저 많은 맛집들을 내가 다 놓치고 있다니!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먹을 것이 저렇게 많은데!"라는 왠지 모를 조바심도 신기하게 가라앉는다.
모든 것이 대체적으로 한국보단 덜 풍족하지만, 그만큼 균형을 자연스럽게 찾아주는 로스팔로스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