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디페렌테' (다른 삶) 15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그 주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위생, 보건, 생활경제, 농업, 축산, 사법, 젠더, 환경 등등), 주민대상 교육은 개발협력 프로젝트에서 다양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일했던 동티모르 로스팔로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 - 우리 단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기구, 정부 부처 및 NGO에서 다양한 주제로 주민교육을 실시해오고 있다. 내가 접했던 로스팔로스의 주민과 관련 정부 기관들은 대체로 교육에 적극적이어서, 나와 우리 직원들 역시 기운이 많이 났었다.
다만, "(교육받는 참석자들이) 돈 받는 교육"에 대해 몇 번 고심한 적이 있다. 주민들과 이야기해보면, 인니 식민지 시절 공무원 대상 훈련 참가 수당을 주는 것부터 시작된 듯 하다. 그 이후엔, UN시절 국제기구나 INGO중심으로 Work for Money 프로그램 등을 통해, 도로나 공공건물 등 인프라 건설 시 주민노동 참여에 대해 일당식으로 지불을 해 온 관행도 있었다. 해서, 무슨 교육이 있을 시, “참가수당”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제법 당연한 편.
이에 대해, 우리 단체와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있는 지역 주민이나, 관련 공무원들과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야기를 했었다.
대다수의 주민들은, 물론 돈을 받으면 좋지만, 어떤 훈련이나 교육이 있을 때, “얼마 주는 교육인가?”라는 식으로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괜찮은 교육이다 싶으면 내가 내 돈 내고 가서 들어도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인니로부터 독립된 지가 언제인데 돼 아직까지 인니 시절 관행을 따지냐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우리 들으라고 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고맙고 좋았다. (사실 그 정도로까지 시골 지역 주민들이 정치적이지는 않다...)
UN 시절, 즉 국가가 독립 직후 어수선하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기본 인프라는 물론, 생활 꾸려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비상” 사태에서는, work for money 식으로 원조자금을 인프라와 일반 주민 생활비 보전으로 집행하고 끌어나가는 것이 합리적이고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점점 국가가 안정되고, 각종 대외원조금도 끊기거나 삭감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점점 지속가능, 자립을 강조하는 추세 속에서, 동티모르는 더 이상 그런 “비상”사태의 취급을 받고, 요구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다.
여기서 일을 해 보고,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많은 주민들이 “주민참여 / 공동 작업”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편이다. 즉슨, 돈이 들어가는 재료, 필요물품 구매와 역량강화 교육은 단체가 (정부, NGO, 국제기구 등) 지원을 하되,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처음부터 같이 해 나가는 방식이다. 예컨대 우리 꿈도서관 같은 경우, 미니 도서관을 짓는 시멘트, 석재, 목재 등 자재 일체 및 도서관 책장, 책, 교구, 장난감 등은 우리 단체가 지원하고, 주민들은 함께 협동해서 도서관 건물을 짓는 방식이다. 이웃인 팀이 일하는 Engineer without borders에서도 물펌프나 파이프 건설 때, 수원지 발굴, 굴착 등 기본작업 및 자재 지원은 해당 단체 측이, 파이프 묻고 물길 내는 공사는 주민들이 하는 방식이다. 주민의 노동기여는 무임이 원칙이다.
많은 주민들이 이런 방식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반면, 먼저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제법 있다. 높은 실업률, 낮은 생활 수준, 제한적 소득원 등을 고려하면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이렇게 의존적일 것인가 하는 답답한 마음도 조금 드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교육 참여에 수당을 기대하는 것은 정말 제일로 답답하다.
"이건 인니 식민지 시절, 식민지 정부가 실시했던 참가비 지급을 명분으로, 강제로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그런 교육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교육입니다." 라는 식으로 설득작업을 많이 했었던 기억이 난다. 대신 교통이 워낙 안 좋으니, 교육을 편히 들으러 올 수 있게 교통수단을 제공하고, 사실상 도시락을 싸오라고는 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니, 식사를 제공하는 등 최소한의 기본 여건을 마련했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교육의 컨텐츠나 방향에 대해 계속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
교육을 주최하는 입장에서 단체의 성격과 목적에 부합하는 교육 컨텐츠의 큰 틀은 이미 나와 있다. (예를 들어, 보건 단체에서 실시하는 위생 교육이라든가, 농업 단체에서 실시하는 농업 생산성 향상 관련 교육 등) 하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 부분은 또 다양하기에, 최대한 교육 대상자의 의견이나 니즈를 듣고, 수용하려고 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육 주최자와 교육생, 양쪽 모두에게 만족을 주는 교육은 힘들것이다. 현실적으론, 단체의 방향과 가용 자원, 수요자의 니즈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할 거고, 그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2013년 하반기엔 바우로면 면장님을 만난 적이 있다. 마을리더 워크샵을 기획했는데, 워크샵을 통해 다루거나 배우고 싶은 것에 대한 의견을 들으려고 방문했었다. 그 때 하시는 말씀이 경영이니 자기개발이니 커뮤니케이션이니 매니지먼트 같은 것은 기존 프로그램이 이미 너무 많으니, 좀 실질적인 것을 알고 싶다, 워크샵 대상이 다 세피(=마을 이장, 면장)들이니 관할 구역내 인구 통계라든가 현황파악을 하는 데 잘 쓸 수 있는 기초통계라든가 인구현황 파악 및 관리 방법 등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좀 얻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와 직원들 역시 공감했었고, 이런 부분을 당시 모 지자체 담당자에게 전달했었다. 이 지자체의 관계자 네 분이 직접 로스팔로스에 오셔서 워크샵을 진행하기로 하셨기 때문. 그러나 이렇게 전달된 주민들의 니즈는 전혀, 혹은 거의 교육에 반영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해당 지자체의 장 스케쥴에 막판까지 온 신경을 다 썼기 때문.
해당 지자체의 장이 직접 온다 만다를 끝까지 바꾸고 바꾸다가, 결국엔 오지 않았다.
뭐, 그렇다.
높은 분들의 역할과 기여는, 현장의 요구와는 아무래도 초점이 좀 다르다. 높은 분들은, 내가 고생해서 거기까지 비행기 타고 가는데 (심지어 직항도 없는 곳), 기사 쓸 거리, 사진 찍을 거리가 좀 나와줘야 한다. 그래야 시정 홍보도 되고, 나아가 재선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사업 담당자 입장에서야 자기 사업과 담당자 자신 모두 눈도장을 예쁘게 찍히고 싶으니 열심히 어필 했겠지만, 이런 부분이 제대로 나오질 않으니, 결국 높은 분이 안 오신다고 할 수 밖에.
우리쪽에, 그 나라 높은 사람 좀 섭외해라 (우리 높은 분 가서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찍게), 무슨무슨 국제협력 분야 상이 있는데 거기에 낼 만한 자료를 한 번 짜 봐달라 등등 요청을 했고, 우리도 최대한 협조는 했지만, 결국 높은 분은 안 오시기로 하셨다.
거기에 북치고 장구치느라 시간과 노력을 다 썼으니, 정작 이곳 주민들 대상 교육은 좀 뒷전일 수 밖에... (우리가 참가자들 만나서 이야기듣고, 정리해서, 전달한 건 뭐람?!)
사실 여기까지 오셨던 관련자 선생님 네 분은 모두 상냥하고, 괜찮은 분들이고, 나름 대로 역할을 잘 나누어 준비를 해 오셨다. 그렇지만 막판까지 높은 분 일정으로 꼬이면서 서둘러 준비를 하느라 그랬는지, 자료 자체를 5일 전에야 우리 쪽에 넘겨 주셨다. 3일짜리 교육이었는데, PT자료만 완전 산더미! 거의 전날에야 번역을 끝낼 수 있었다.
게다가 강의안 자체가 그냥 일반 한국시민 대상의 강의안이다. 쉬운 용어를 쓰려고 노력했고, 예시도 많이 준비해 왔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현지 눈높이라든가 사전 고려가 없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냥 한국에서 쓰던 자료처럼 보이는 것을, 그대로 들고와서 단어만 조금 쉽게 바꾸려는 느낌! 그것도 불과 며칠 전에 넘겨준다는 것은 역시 마음가짐의 문제가 좀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실제 이루어진 교육은 역시나 그랬다. 그냥 한국에서 쓰던 자료와 내용을 그대로 들고와서 단어만 조금 쉽게 바꾸려는 느낌. 물론 교육의 주제가 보편적인 부분이 분명 있고, 중요한 내용을 다루고는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기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 조금씩이라도 각자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공감한다. 그러나 너무 그냥 편안하게 한국식 사고, 한국식 자료, 한국식 맥락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느낌!
국경을 넘어선 연대와, 협력, 지구촌이란 수사가 많이 쓰이고, 실제로 많은 의미있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상대방의 눈높이를 고려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 평범한 주민들과, 일선에서 이를 열심히 듣고 전달하려고 하는 중간자, 그리고 이를 전해듣는 갑 (지자체는 중앙 정부와 더불어 돈을 주는 중요한 갑!)이, 상호존중하면서 굴러간다면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