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디페렌테'(다른 삶) 14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가축 함께 기르기' 프로젝트 신규사업지 선정을 위해 라싸면의 마울로 마을에 답사 방문을 다녀왔다.
일전에 라싸면, 호메면, 레우로면의 3개 면장님을 각각 만나뵙고, 사무실에서부터의 접근성 (너무 멀거나 길이 험하면, 사실상 제대로 모니터링이 어렵다), 정부 및 타 NGO의 기 지원 여부, 우리 사업에 대한 면장님들의 이해도 및 협조 의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라싸면으로 최종 결정을 했었다. 사무실에서부터의 거리는 사실 거의 다 비슷하니 그렇다 치고, 레우로면 같은 경우는 정부로부터 큰 지원을 받는 중이고, 호메면은 기존 지원 받은 내용이 있어서 최종적으로 라싸면을 하기로 한 것. 면장님들의 태도 및 적극성은 사실 어느 정도 주관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부분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하지만 라싸면장님이 나와 담당 직원들 (현지인 직원 1, 한국인 직원 1)로부터 제일 많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 라싸면의 3개 마을 중 가장 사정이 열악한 편이라는 마울로 마을로 찾아가는 날.
마을 이장님을 만나, 마을의 대체적인 현황을 파악하고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기본 개요 설명을 드리고 의사 타진을 해보기로 했다. 직원 셋과 나, 넷이 함께 마울로 마을로 향했다. 차로 약 30분 정도가 걸려, 꽤 거리가 있다. 마울로 마을 이장님께서는 인상이 좋아 보이는 50대 후반 정도의 남자 분이셨다.
기존 가축 지원 혹은 소액대출 프로그램 등을 마을에서 실행한 경험이 있냐고 여쭈어 보니, Child Fund에서 닭 구매를 지원한 적이 있단다. 그냥 구매만 지원한 것이어서 가축을 돌보는 부분에 대한 교육이라든가 백신 등은 딱히 지원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 프로젝트는 가축구매 대금을 대출하고, 상환 기간 동안 그룹이 함께 축사 만드는 법, 가축 돌보는 법 등을 배우고 실습하고, 백신이나 교배 지원을 실시하는 등 책임감과 역량강화를 함께 도모하는 사업이다는 설명을 드리고, 라싸면 내에서도 마울로 마을을 우선 추천받았다고 말씀을 드렸다.
이장님의 반응이 영 미지근하다. 즉슨 월부로 상환하는 것이 제대로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며, 돈이 필요하면 각자 개인적으로 조달하는 것이지 그룹식으로 할 필요성에 대해서 잘 확신을 할 수 없다, 그냥 도움을 받는 것, 공짜면 모르겠지만, 상환형 프로그램은 부담스럽다고 이야기를 하신다. 관심이 없다는 뜻을 밝히셨다. 살짝 섭섭하긴 했지만 정중히 우호적인 인사를 상호간에 나눈 후,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현지인 직원 두 분께, 만약 마을 이장이라면 이런 프로젝트 신규 제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시겠느냐하고 여쭈어 보니, 두 분은 다들 찬성 할 거란다. 물론 우리 직원분들이시기 때문에 답이 객관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두 분 왈, 일단 기본은 공짜가 아닌 상환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간동안 받는 백신이며 교배 지원이며, 교육 등의 지원이 분명 더 이익이 크다,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다고 하시는데,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콘스타 직원은, 막상 마을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장님께서 “Taka dalan 길을 닫았다”라고 하시며 못내 섭섭해 하시는 눈치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이장님의 협조가 사실 꽤 중요한데, 초반에 벌써 저렇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주신 분이라면 어떻게든 진행을 한다고 해도 나중에 힘들어 질 것이 뻔하다. 물론 이장님을 무시하고 진행하려면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방식은 지역 사회 내에서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에 결코 좋은 방식이 아니다.
“그냥 공짜면 모르겠지만…”이라는 반응은 사실 꽤 착잡하다.
사정이 너무 열악하고 힘든 곳에서라면 사실 어느 정도의 무상지원이 정답일 때도 있다. 당장 모든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든 데, 거기에다 대고 역량강화니 장기적 이득이니 하는 말은 그냥 수사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어느 순간, 어느 시점에서는 내부의 타성을 극복하고, 차근차근 자립할 수 있는 방향전환을 시작해야 한다. 언제까지 외부에서 던져 주는,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도움들에만 의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은 소중하고 좋은 일이지만, 일방적으로 기대기만 하는 타성은 스스로의 힘과 기를 빼앗고 취약하게 만든다. 마울로 마을은 정말 무상지원만이 절실한 단계여서 자력기반 프로젝트를 거절한 것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타성에 젖어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모르겠다. 아무쪼록 후자가 아니기 만을 바랄 뿐.
외부인, 그것도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외부인의 시각에서 “언제까지 도움에 기대어 살 것인가”라는 식의 시각을 들이대는 것은 스스로 상당히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여기에 몸은 있을 지언정, 생활의 많은 부분을 이곳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에는 실제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생활의 어렵고 복합적인 면들을 보지 않고, 행여나 너무 쉽게 이론적으로만 '자력과 책임감, 지속가능성'을 말로만 떠들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으로 더 나은 수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든 자신에게 익숙한 틀을 깨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그 어려움의 '적당한 수준'과 타이밍이 여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좁히려면 어쨌거나 어쨌거나 서로 이해를 해 주어야 하고, 서로 설득을 하면서 좁혀 나가야 할테지. 우리 직원분들과는 이런 부분이 꽤 되었다고 생각하고, 우리와 같이 일해 오신 마을 분들과도 이런 부분이 꽤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런가. 마울로 이장님과 같은 분을 만나면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
이 후, 우리 프로젝트는 레우로면 차라노 마을과 진행하게 되었다.
직접 마을에 가서 설명회를 하고, 주민과의 접촉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되면, 관심있는 사람들의 실제 수와 측면이 보일 텐데. 그 전에 일단 이장님이 오케이를 해 주어야 한다. 차라노 마을에 가면서도 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이장님께서 점잖고 호의적이시다.
“나는 일단 모든 기회는 다 환영한다. 당신들이 와서 설명회를 하면 이를 듣고 관심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진행하면 될 일이다. 일단 마을 사람들이 듣고 난 후에 결정을 하면 되는 것이다”며 지극히 합리적인 발언을 해 주셨다.
우리 직원들과 나, 모두 안심도 되고 기분이 좋아졌다.
차라노 마을은 풍경이 참 좋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마을 능성 너머로 멀리 풍경이 펼쳐져 보이는데 굉장히 원시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시원하다. 여기와 좋은 인연을 맺어 나갈 수 있기를! 서로 주고받는 좋은 프로젝트가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