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하나 Mar 15. 2024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요

트라우마에 대하여


얼마 전 남편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 당시에는 자기가 회복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가 봐!


그때 나는 며칠 전에 문득 슬퍼져서 울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면 생각나겠지.' 한숨을 크게 쉬었던 때가 있다.


3월, 아득하게 느껴졌던 3월이 왔다. 인간관계 회복, 병원 방문, 일상 복귀.. 숨 쉬듯 자연스러웠던 모든 일은 나에게 도전이었다. 투쟁의 연속이었다.

- 람들하고 교류하는 자체가 힘겨워요. 자신이 없어요. 다 놔버리고 싶어요.


그때 선생님은 내 편이었다.

-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할 수 있을 때 천천히 해도 돼요.


소통은 만능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여력이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방전되었을 땐 의미가 없음을 실감했다.

 



지인들은 놀라워했다.

- 다들 시험관을 힘들어하던데 별로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사실이었다. 나는 시험관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혈전 때문에 프롤루텍스, 크녹산을 맞으면서도 ‘이 주사 좀 짜증 나네.’ 정도였을 뿐이다. 계류 유산을 했을 때도, 피검 수치가 안 나왔을 때도, 수치가 나왔다가 떨어졌을 때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않고 다음 차수로 넘어갔다.



그런데 10주 넘게 주사로 지켰던 아기를 포기하고 나서 달라졌다.


병원에 머무는 과정도, 시험관을 하는 과정도 모두 고역이었다. 


병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릴 때면 두통이 시작됐다. 임신 확인 후 바우처 안내를 받는 산모를 보면 당시 내가 오버랩되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성실하게 주사를 놓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울 때가 있었다. 이렇게 주사를 맞아도 아기를 만나지 못할 수 있는데, 좋은 소식이 언제든 안 좋은 결과로 끝날 수 있는데 무엇을 위해 하는 거야? 또 다른 내가 비웃었다.


희망이 숨어버린 상황에서도 나는 노력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멘탈 관리가 안 된다. 자꾸 생각난다. 안절부절 초조 이 과정이 숨 막힌다. 다 놔 버리고 사라지고 싶다. 용기를 내서 마주했으니까 끝나야 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여기에 있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도 싫다. 내려놓고 싶은데 잘 안된다.’



용기 내서 마주했으니까 끝나야 하는데
끝이 안 보인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선생님께 털어놨다.

- 배에 주사를 꽂으면서.. 주사기를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여러 차례 겪었어요. 이 끝이 좋지 않을 수도 있음을 잘 아니까요. 그때 생각이 나요. 결국 끝이 좋은 기억이 아니었으니까요.

말을 마치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오랜만에 오열을 했다.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야 감정을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어떤 감정인지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실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안 괜찮았던 자극이 괜찮아지는 건 아니었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때로 돌아가는 순간을 알아차린다. 불행 중 다행이다.


두려웠고, 불안했고, 공허했고, 적적했고, 무력했던 그때로 돌아가기 전 정신을 차린다.

'나 오늘은 컨디션이 좀 안 좋네.’


그리고 나에게 편안한 것들을 반복하는 충전 모드로 바꾼다. 일정을 취소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집에 와서는 흰둥이 냄새를 실컷 맡는 식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챙기는 것처럼 내가 약해지는 날 스스로 챙기는 방법을 만들어냈다.



트라우마는 여전히 곁에 있다. 나는 살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행해지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