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이란 한 문장으로 알려줄게

by 노준성

서정이란 새벽이 아직 이름을 갖기 전 창가에 내려앉은 숨결처럼 말보다 먼저 마음에 도착하는 떨림이며, 비 오기 직전 골목의 공기가 먼지를 눌러놓는 동안 오래된 간판의 낡은 모서리에서 떨어지는 시간을 세어보게 하는 느린 인내이고, 한때 서로를 불렀으나 주소를 잃은 이름들이 저녁빛 속 가로수 그림자에서 다시 손을 맞잡는 착각이며, 웃음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미세한 온기처럼 사라짐을 전제로 존재하는 약속이고, 밥 짓는 냄새가 계단을 타고 오를 때 어머니의 발자국과 겹쳐 밀려오는 생활의 리듬이며, 떠난다는 말보다 남아 있다는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해 주는 정직한 체온이고, 창문을 닫아도 스며드는 바람처럼 붙잡을 수 없으나 분명히 느껴지는 방향이며, 먼 역의 플랫폼에서 서로 다른 열차를 기다리다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낯선 연대이고, 흰 종이 위의 그늘이 스스로를 나무라 믿는 짧은 믿음이며, 계절이 바뀔 때 같은 길이 다른 목소리로 인사하는 것을 알아듣는 귀이고, 실패의 밤에 켜둔 작은 불빛이 다음 날의 얼굴을 미리 어루만지는 예감이며, 고통이 남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편지를 다시 쓰는 용기이고,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혀져도 괜찮아지기 위해 쓰는 세월의 호흡이며, 눈을 감으면 더 또렷해지는 풍경을 믿는 마음이고, 부서진 말들 사이에서 아직 깨지지 않은 추억 하나를 건져 올리는 손의 떨림이며, 슬픔을 낮은 음으로 말하게 하는 절제와 기쁨이 울음으로 변할 때를 숨기지 않는 솔직함이고,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눈발 속에 한 걸음 더 내딛는 결정이며, 지나간 사랑의 서툼까지 보관하는 성실함이고, 고요를 공포가 아닌 휴식으로 알아차리는 성숙이며, 타인의 슬픔을 대신 말하지 않고 곁에 앉아 숨을 맞추는 예의이고, 끝내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누군가의 삶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그래서 서정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쉼표 사이로 살아온 날들의 먼지가 반짝이며 이어지는 깊은 기억인 거야.

월, 화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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