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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15. 2020

[DAY106] 지옥과 천국을 오고 간 하루

지수 일상 in Berlin


이러나저러나 이곳에서 먹는 조식도 어느덧 마지막이다. 한인민박들의 마지막 코스는 항상 카레인가? 프라하에서도 마지막 조식으로 소시지 하나를 더한 카레로 마무리했는데, 일반화할 생각은 없지만 역시 카레만 한 굿바이 인사로 제격인 게 없는 것 같다. 이번에는 달고 시원한 수박까지 더해져 갈증이 싸악 사라졌다. 사실 이번 베를린 한인민박에서 나는 방을 한번 이동했다. 첫날에는 꽤 넓은 방에서 나와 동갑인 친구와 지냈는데 둘째 날에는 그 넓은 방에서 나 혼자만 지냈다. 그리고 세 번째 날에는 민박 사장님의 요청으로 짐을 싸들고 또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기존에 사용하던 방의 약 3/2 정도 크기인 방이었지만 사람 수는 오히려 한 명 더 늘어난 상황.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한 방을 함께 사용하는 여자분 두 분이 친구이자 오랫동안 함께 여행해온 사이라 그런지 굉장히 나를 친절하게 맞아주셔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여행을 하다 만난 생각지도 못한 인연도 꽤 재미있는 것 같다.



오늘은 벌써 베를린을 떠나는 날. 역시나 나는 다른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희영이의 계획에 나도 함께하기로 했다. 전날 잠들기 전에 희영이가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는 이곳. 나는 사진으로만 봤던 곳이라 가볼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나도 가보게 되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아침 10시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강을 따라서 쭉 늘어선 이곳에는 수많은 벽화가 있었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베를린 장벽 일부에 조성된 미술 갤러리로 슈프레 강이 보이는 위치에 1.3km 길이의 장벽에 조성되었다. 이 갤러리는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야외 공개 갤러리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 있는 그림들은 변화된 시간을 기록하고 행복감과 더 나은 희망,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더 자유로운 미래를 표현했다고 한다(위키백과) 한참을 걸어갔는데 아니 이것은? 사진으로나마 몇 번 봤던 작품.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벽화의 상태가 좋았다.(검색을 해보니 원래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다가 2009년 복원 작업을 했고 지금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여느 관광객들처럼 나도 셀카부터 작품만을 담은 사진까지 여러 장 찍었다.



이곳에서도 만나는 지상 위로 올라온 파란 수도관. 괜히 전날 한번 봤다고 오늘은 괜히 반가웠다. 이날 사실은 아침부터 다이내믹했다. 희영이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제시간에 가기 위해 메트로를 허겁지겁 탔다.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한 나는 희영이에게 연락을 했고 희영이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약 15분 정도 전화도 하고 메시지를 남겼지만 그녀는 답이 없었다. 이미 나는 여기에 와버렸는데 어쩌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갤러리를 둘러봤다. 한참을 보고 난 후, 다시 메트로를 타기 위해 되돌아가던 나는 핸드폰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희영이는 늦잠을 자느라 알람을 듣지 못했고 내가 취했던 연락마저 받지 못했다. 희영이와 함께 오지 못해 조금 아쉽긴 했지만 볼 계획도 없었던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볼거리를 잘 보고 왔다지?



여행지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의 순간순간은 아쉽다. 돌아가면서 기다리는 플랫폼마저 괜히 애착이 가는 기분이다.



숙소로 돌아가 30kg, 7kg짜리 캐리어 두 개와 무거운 배낭, 그리고 크로스백까지 메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는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동물원 역까지 출발 20분 전에 도착했다. 짐이 워낙 많은 터라 화장실을 가는 것은 고사하고 점심으로 먹기 위한 샌드위치를 사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기차역이라 짐을 분실할 가능성이 많았기에 한국처럼 어디에 잠시 캐리어를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짐을 들고 샌드위치를 고르고 결제하는 곳까지 가서 카드로 결제하고 사인까지(현금으로 결제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잔돈은 어떻게 받으려고?) 하여튼 힘든 과정을 거쳐 플랫폼으로 가 기다렸는데 네...? 35분이나 연착되다니요? 금방 지나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안내판에서는 50분 연착되었다는 문구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살려줘. 기차에서 타서 마음 놓고 먹으려고 산 샌드위치였는데... 지쳐서 그런지 배가 고파 플랫폼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맛있는 것(계란, 햄, 양상추 등등)들만 모여있어서 맛있을 줄 알았는데 맛이 하나도 없었다. 내 돈...



정말 웃음밖에 안 나왔다. 설국열차 꼬리칸 같은 이곳, 자유석이라는 말에 기대했는데 정말 말 그대로 개판 5분 전이었다. 자리가 정말 하나도 없었다. 지나다니는 통로는 왜 이렇게 좁은지 빈자리를 찾기 위해 캐리어 두 개를 들고 계속해서 걸어갔는데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결국 자리를 찾지 못한 나는 약 30분 동안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한 할머니께서 짐을 의자 옆에 두어도 된다고 하셔서 간이의자에 잠시나마 앉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바라본 창 밖의 풍경은 꽤나 아름다웠다. 이제야 이 풍경이 눈에 들어오다니. 하지만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이 곳에서 5시간 동안 가는 것은 정말 지옥이었다. 지친다 지쳐. 얼른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짐에 파묻혀 기차를 타고 간지 어언 5시간이 흐른 후, 나는 드디어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는 대학에서 융합전공을 하다가 알게 된 사이인 언니와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프랑크푸르트 역까지 나를 데리러 와 주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그동안 힘들었던 것들이 싸악 사라졌다. 마치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친구들과의 재회 장면이라도 찍는 것처럼 방방 뛰면서 서로를 반겼고 바로 저녁을 먹으러 시내로 향했다. 언니와 친구가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는 한 가게에 들어갔는데 수많은 메뉴를 보기도 전에 라들러를 마실 생각에 심장이 두근댔다. 여기가 내 천국이다. 오늘 천국과 지옥을 오고 가는 것 같다. 역시 여행은 아시아 음식이지? 주문한 음식은 모두가 다 맛있었고 프라하 이후 만난 우리들은 여전히 할 말이 많아 재잘재잘 거렸다. 독일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은 아니지만 그래도 현주(친구)와는 마지막으로 보내는 시간이라 아쉬웠다. 언젠가는 다시 또 오고 싶은 나라, 독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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