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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20. 2020

[DAY109(2)] 돌아가니 보이는 보석같은 풍경

지수 일상 in Amsterdam


나는 길을 지나다가 빈티지 샵을 봤는데 안 들어가면 죽는 줄 아는 사람인가 보다. 굳이 뭐가 필요하지 않고 돈이 없어도 꼭 한 번은 들어가서 훑어보고 하나씩 입어봐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이번에도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뭔가 의무적으로 들어가 본 빈티지 샵이었는데 생각보다 예쁜 아이템이 너무나도 많아서 구경하고 한 번씩 입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비싸? 도시 물가 따라간다고 그런 건지 베를린이나 슬로베니아에서 봤던 것들과는 천지차이였다. 예뻐서 입어본 것들 중 조금은 기장이 짧은 숏 자켓이 있었는데 오늘 내가 입고 간 바지 때문인지(발목 위로 올라오는 9부 바지) 왠지 모르게 손뼉 치는 원숭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울로 쳐다보게 되는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이 옷은 아쉽지만 패스, 가격도 적당한데 예쁘고 새것 같은 빈티지는 없는 건가? 정말 운 좋게 한번 그런 블레이저를 두 개나 발견했던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쉽게 잊기가 힘들다. 어디 있니 도대체?

 


오늘도, 역시나, 암스테르담의 하늘은 맑고 푸릇푸릇하다.



숙소 유학생 언니가 빌려준 패스카드를 반납해야 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무료로 갔다 온 곳이 많아 뽕 뽑을 것도 없었지만 반납하기 전 최대한 많은 곳을 다녀오기 위해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 들렀다. 바로 '렘브란트의 집' 0원의 행복이라서 그런가, 들어갈 때부터 시간이나 모든 걸 다 보고 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덜했다. 미안해요 렘브란트, 사실 그의 작품이나 그가 살아온 인생 등 아예 잘 모르고 와서 그런지 관람을 하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기존의 전시관과 달리 매우 좁은 공간에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림 이외에 조각, 살림살이 등이 재현되어 있어 보고 슥슥 지나갔던 것 같다. 중간중간에 내 취향이었던 색감을 담은 그림, 팔레트를 보면 눈길이 가기도 했다.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가는 여행, 오늘의 콘셉트로 잡았다. 계획된 일정이라고는 그저 오전의 반 고흐 미술관밖에 없었다. 그곳은 무려 한 달 전부터 가기로 예약을 해 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따스한 햇살을 마주하고 내가 갈 수 있는 곳을 한정해두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암스테르담에서 여행자로서 가볼 곳이 굉장히 많아 나에게 주어진 시간으로는 이 모든 곳을 방문하기에 너무나도 촉박하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할 수 있는 것, 갈 수 있는 곳도 괜히 못 가게 되고 일이 꼬이게 되는 불상사를 여러 번 겪어보기도 하고 간접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본 적이 적지 않다. 쉬러 왔는데 괜히 피곤해지고 싶지는 않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한 카페로 향했다.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이곳. 암스테르담에 와서 느낀 거지만 의도치 않게 카페를 자주 가지 못했다. 여행 와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 도시의 골목에 있는 카페에 가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상황이 조금은 억울하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지금까지 카페를 들어갈 수 있는 정신이 없었다. 오늘도 암스테르담에 온 지 3일 차인데도 불구하고 그 흔한 카페를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다. 이게 웬일인가? Back to Black. 사람들이 북적하지 않은 골목 끝에 위치한 이곳은 매장에 들어가 보면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암스테르담의 숨은 보석 같은 곳.



참 신기하게도 좁은 가게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리에 엉덩이만 붙이고 앉으면 그 작은 공간은 그들만의 세상이 되는 것 같다. 오늘 이곳에 나는 혼자 왔지만 카페 한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서 서로서로 낯선 관계들로 이루어진 그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혼자 왔지만 중앙 테이블에 앉아 커피에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주문했다. 바나나 파운드와 카페 라떼,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약간의 보너스 같은 느낌이다. 왜 사람들이 많은지 몰랐는데 일단은 커피가 맛있다. 라떼이지만 우유 맛만 강한 게 아니라 에스프레소와 잘 어우러져 고소했다. 내 옆에 앉은 한 남자에게 벽에 흰 분필로 적은 와이파이 번호를 물어봤다. 렌즈를 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작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더니 그분은 이곳에 많이 와서 "내가 그 맘 알지"라는 뉘앙스로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그리고는 한국이었으면 와이파이부터 굳이 옆사람에게 묻지 않았겠지만 여기가 어디인가? GENEROUS의 끝판왕인 곳 아닌가? 따스한 햇살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스몰 토크로 이어졌다.   

 


시끌시끌한 매장 안의 분위기와 달리 혼자서 열공하던 한 언니(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뭔가 대단해 보이고 배울 점이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모두 해당되는 것)가 있었다. 비록 공부나 일을 하러 카페에 온 것처럼 보여 무조건적으로 행복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날씨도 너무 좋고 남인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여 제삼자인 내 입장에서는 여행지의 느낌보다는 현지인의 일상적인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이곳에서 책을 읽고 싶었다. 나는 사람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한참 동안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주변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 오랜만에 앉아있는 시간이라 한국에 있는 엄마와 통화도 잠깐 했다.



잘 쉬다 갑니다, 잘 있어요 커피 언니?





굴다리 같은 곳을 지나가다가 만난 사람들. 버스킹을 하는 밴드였는데 일반적인 버스킹과 달리 바이올린부터 트럼펫, 그리고 아코디언까지 연주하는 사람들이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여행은 이런 상황을 갑작스럽게 마주하면서 경험하는 것들로 차곡차곡 채워지는 것 같다. Moco Museum에 뱅크시 작품이 있어서 패스카드로 한번 들어가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곳은 패스카드로 입장이 불가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라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굳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입장하지 않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어제 만났던 진주 언니에게 연락이 왔는데 근처의 반 고흐 뮤지엄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락 오면 반가운 사람이라 그런지 고민하지 않고 언니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뮤지엄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뭉게뭉게 구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미 커피와 바나나 파운드케이크를 먹고 와 배가 별로 안 고팠던 나는 언니와 들어간 카페에서 커피만 한잔 더 했다. 알고 보니 이 곳은 팬케이크 맛집! 언니는 여기까지 왔는데 안 먹을 수 없다는 주의라 가장 베이직한 팬케이크를 주문했다. 아니 근데 메이플 시럽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는데 정말 곰돌이 푸가 와도 하루 안에 먹으면 당뇨 걸릴만한 양이 그릇에 오픈되어 있어 놀랐다. 저게 정상인가요?

 


언니와 잠시 수다 떨다가 나는 늦은 오후에 예약해놓은 마지막 투어를 떠났다. 바로 '안네 프랑크의 집'! 이곳도 반 고흐 뮤지엄처럼 한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으로 같은 날 예약을 했다.(안네의 집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아무리 현장에서 기다린다고 해도 입장할 수 없다. 꼭 참고하기!) 미리 예약은 했지만 들어가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했다. 그런데 너무나도 사람이 많아서인지 입장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곧장 입장은 할 수 없었다.





전쟁 중, 안네는 가족들과 벽장 뒤에 있는 공간에 몸을 숨기고 그녀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 일기로 남겼다. 그리고 이곳에는 안네가 쓴 일기 말고도 그녀 가족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빼곡히 적힌 그녀의 일기장, 사실 나는 안네에 대해 잘 몰랐다. 그저 암스테르담을 다녀간 사람이라면 한 번쯤 와볼 법한 곳이라 사전에 예약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곳을 다녀온 이후로 더 많이 알고 싶어 졌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록으로 남긴 당시 상황, 그녀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경험한, 그리고 평소보다는 스케줄 된 일정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나름의 여유를 찾은 긴 하루였다.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안네의 집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나는 진주 언니와 만날 수 없었고 관람을 끝낸 나는 곧장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트램 정류장으로 향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많이 아쉬웠던 나는 일부러 조금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암스테르담 시내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다. 약간의 모험이었는데 이게 신의 한 수였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노을이 지는 이곳. 또 올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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