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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Mar 07. 2018

사랑의 변주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모양]

 '하트 모양'은, 심장의 형태를 본떠 사랑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로써, '하트'를 사랑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당연해 보였다. 얼굴은 표정을 숨겨도, 심장이 뛰는 소리는 숨길 수가 없으니까. 유독 티가 나는 부분이 그것이었을 테니까.

 어느 기발한 누군가가 '하트'를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삼아버리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던 반쪽짜리 심장을 이어 붙여 '하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통일된 심벌은 사랑의 글자를 하나로 묶어냈지만, 사랑이 단지 말을 배웠다해서 끝이던가. 이 영화가 내게 알려준 것은 '말'을 넘어선다.


[감정]

 일라이자는 괴생명체를 만나고, 묘한 감정을 느낀다. 동질감에서 비롯한 감정은 점점 더 짙어진다. 동정심과 호기심, 두려움으로 일라이자는 더욱더 괴생명체에 끌린다. 손을 맞댄 벽 너머로 느껴지는 감정은 무엇보다 복잡했다. 마냥 풀기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런 애매한 감정들을 뭉뚱그려 '사랑'이라 말하곤 했다.


 저마다 다른 대상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데, 어떻게 '사랑'이라는 범주로 개개의 감정과 시간을 통일할 수 있을까. 그릇에 맞춰 물이 바뀌듯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퍼즐 모양이 있는 법이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생명들이, 하나의 기준에 자신들의 삶을 맞출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가능한 건 오직 상대에 맞춰 흐르는 일이다. 마치 춤처럼.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는 일뿐이다.


 일라이자는 괴생명체와 춤을 춘다. 상대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없어도 개의치 않는다. 마음으로 이어지는 세계 속에서 둘은 너무도 다정하게 서로를 부른다. 그 모습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둘은 사랑으로 서로를 매만진다. 그제야 비로소 와 닿는다. 결국에 중요한 건 사랑의 범주가 아닌, '변주'라는 것을.


[]

 스트릭랜드는 인류가 이룩해온 역사의 증인처럼 등장한다. 그가 표현하는 것은 폭압의 역사다. 미신과 혼란을 통제하는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 냉전 시대의 두 진영이 그러했듯, 그 또한 미지의 대상에 폭력적으로 대처한다. 그는 통제와 폭력으로 침묵을 강요한다. 패자의 위치를 극렬하게 거부하는 그는, 오롯이 승자의 역사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괴생명체'. 사실, 마땅한 명칭이 없어 '괴생명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영화 헬보이에 나왔던 '에이브'와 많은 부분이 닮아있어 그런지 그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겉모습도 비슷하지만, 무척이나 '물'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바라보는 이에 맞춰 제 모양을 바꿔낸다. 딱 잘라 모양을 설명할 수 없으니, 물은 물로써 그릇에 맞춰 제 몸을 바꾸는 것이 전부다. 왜 다른 모습이지 못하냐고 물어본들, 어떻게 더 설명하겠는가. 존재는 존재 자체로써 빛이 나고, 이해는 전적으로 시선의 문제인 것을.

 이 어인은 스트릭랜드와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인간이 역사를 써 내려가며 기록하지 않아 끝내 사라져 버린, '이름이 지워진 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살아남은 이들의 손으로 써 내려가는 기록에는, '우리와 닮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다.


 팀 버튼 감독이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시선은 무척이나 따뜻하다.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의 세계를 그려낸다. 공감과 시선의 변화로 자아내는 이야기의 결은 무척이나 오묘하다. 결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랑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는 방법으로는 바랄 것 없이 좋았다.

왜 갑자기 펭귄맨이 생각났을까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배트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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