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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Dec 31. 2018

Lust for Life

영화 '트레인스포팅, T2: 트레인스포팅 2'


 우리가 선택을 선택할 수 있을까? 선택이라는 힘, 그 막중한 책임과 권리를 짊어질 운명이 내 앞에 놓여있을까?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선택하는 것보다 선택을 당하도록 설계된 판 위에서 그저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강아지들은 아닌가? 선택당하는 삶을 갈구하면서 말이다. 선택을 하는 일은 고되고 피곤할 따름이다. 아니 무엇을 골라도 이미 답을 정해버린 당신은 언제나 내 선택을 무시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결국에는 이끌고 가지 않던가? 그런 상황에서 나는 대답을 포기하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언제나 불안할 수 있다. 불안은 상대적이다. 상대적인 불안은 어느샌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린다.


 시대가 세대의 초상을 다르게 그려낸다. 60년대, 70년대, 8,90년대 각기 다르다. 한 가지는 같았다. 어른들이 청년을 바라보는 시선, 젊은이들은 겨우 문자가 만들어져 기록할 수 있을 때부터 싸가지가 없었다. 전통 혹은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세대를 불문하고 청춘의 초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동안 기록을 할 수 있었던 이들이 확고부동한 엘리트 집단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자에 대한 권한도 기록에 대한 가치도 소수 집단의 전유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때문에 권위와 위치를 뺏기기 싫었던 이들은 언제나 젊은이들을 틀에서 벗어난, 옳지 않은, 방황하는 집단으로 그려왔던 것은 아닐까? 예의범절에 대한 규정으로 이들을 묶어내며 말이다.


 두려움과 불안을 잠식하며 공황이 찾아온다. 관찰자의 입장에선 막연해 보이나 직면한 이들에게 불안은 현실이다. 공황이라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들은 그 무거운 공기에 짓눌린다. 서서히 쓰러진다. 막연한 불안감은 찌르는 아픔으로 느껴지는 대신에 체한 듯 무거워진다. 오히려 쑤시듯 아프면 그 통증이 삶을 깨울 텐데 이 불안은 그렇지도 못하다. 렌튼의 패거리는 기꺼이 아픔 대신 쾌락을 택했다. 깨어나는 대신에 잠에 들었다. 아예 취해버려 처지도 잊어버릴 정도의 마약이나 술, 섹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미래는 선택지에 없었다. 간헐적으로 돌아오는 제정신은 기댈 곳이 못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약을 하고 술을 마시며 정신없이 춤을 춘다.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의 처지를 자조한다. 저녁엔 약을 하고, 아침엔 빈둥거린다. 돌아오지 못할 선택을 하고 나면 그 선택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랑 엮인다. 인간성의 한 귀퉁이가 떼어져 나가야 비로소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눈치채게 된다. 마약중독자 렌튼의 삶. 고향, 동네 친구들, 만났던 사람들 모두 관성처럼 삶을 변화에서 끌어내린다. 렌튼은 그런 삶 자체에 중독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의 몸부림이 그들의 일과였다. 뛰어가는 그들의 등 뒤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은유하듯 중독은 행동에서 습관으로, 습관에서 삶으로 번져나간다. 그렇게 돌아보고 남는 건 처절한 무기력뿐이다.


 군대에서 태풍 피항을 갔던 적이 있다. 태풍 피항을 가면 배는 항구에서 떠나 바다에 투묘하고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항구에 정박해있다가는 강한 바람에 배가 부서진다. 항구를 벗어나 바다에 머무는 일은 무척 두려운 일이다. 파도가 수없이 배를 뒤흔든다. 망망대해에서 그저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려야 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수십 년간 배를 타던 간부도, 이제 갓 배에 들어온 신병도 전부 뱃멀미에 고통스러워한다. 렌튼의 일탈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택할 수 없던 상황들.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지독한 혼란. 경제 공황에 빠진 세상의 처세술은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지를 선택이라 부를 수는 없다. 필요한 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렌튼은 도망쳤다. 그의 친구들을 두고 떠났다.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도피였다. 고향을 떠났다. 큰 세월을 건너 다시 돌아와 재회한 친구들은 여전했다. 이제 막 사회로 뻗어 나와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하던 그때와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몇 살 더 먹고 나면 달라질 줄 알았다. 그래도 직장을 갖고 나면 다를 줄 알았다. 으레 불안한 것이 20대의 삶이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일시적인 문제들이라 믿었던 환경들이 삶을 지배하는 마음가짐으로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 렌튼과 친구들은 어른이 되었다. 그저 그런 어른이 되었다. 어느 누구의 존경도 받지 못하고, 어느 누가 따라 하고 싶지도 않은 이들이 되었다. 어릴 적 한참 씹어대었던 그 존재들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청춘들. 참으로 지독한 농담이다.


청년이라는 단어는 참 묘한 단어다.

일할 때엔 불리하고, 일을 떠나면 가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부럽다고 말한다.

선택하라 말하는 세계 속에서 정작 그들의 선택지엔 하나의 옵션만 있는 데에도 말이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트레인스포팅 & T2: 트레인스포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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