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Q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anderer Aug 20. 2019

미친 얘기 같지만 전부 사실이에요.

영화 '쥬만지'

 행복한 미래. 해피엔딩을 이루기 위한 수많은 조건들은 서술 방식에 따라 무시되거나 일축된다. 높은 확률로 현실적인 결말은 결국, 새드엔딩이 된다. 해피엔딩이 비현실적인 이유는 행복하기 위한 수만 가지 조건들은 영화 속에서 너무도 과감하게 생략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새드엔딩은 구체적이다. 슬프게 끝나야 하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면 새드엔딩이 될 수 없으니까. 구체적이지 않다면, 그건 달성할 수 없는 목표가 되기 십상이다. 달성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는 단지 희망이자 바람으로 끝날뿐이다. 행복한 이후의 삶을 그리는 모든 이들의 생각이 그렇듯이 말이다. 숫자와 문자 속에서 지극히 간명해지는 일상을 뒤집기 위해서는 그런 이유로 과정이 생략된 상상이 필요하다.


 어릴 적에 즐겨봤던 영화들에 현실적인 감상이 덕지덕지 붙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추억으로 머물지 못한다. 쥬만지 같은 영화를 그렇게 소비하게 된다는 건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적어도 내 유년기의 행복 중 20은 그 시절의 로빈 윌리엄스가 갖고 있었으니까. 이름만 불러도 그리운 그 사람의 모습에 이런 이야기를 더한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다. 케케묵은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보니 그 당시의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릇된 감상법이었다. 이미 VHS 비디오테이프가 아니었고, 쾌청을 영화 보기 전에 틀 필요도 없었으니까. 행복감을 느끼려면 조금은 부대끼고, 흐릿해야 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폰트는 정갈하니 무척이나 얄팍했고, 넙데데한 옛날 옛적 글자 모양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반가운 모습도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자전거 폭주족들의 모습은 묘하게 생소했다. 기묘한 이야기에 나왔던 마이크 일당의 인상이 그만큼 강렬했던 탓일까. 먼저 나온 이 영화 속 자전거 폭주족 친구들은 그 기세에 밀려 먼저 나왔음에도 흡사 '짭'처럼 느껴진다. 자전거 끝에 대롱대롱 달린 깃발 보면서 피식피식 웃다가, 그 애들이 앨런을 때리는 모습을 보면서는 머릿속으로 합의금 생각을 했다. 애가 맞았는데 저렇게 담담하게 대처하는 부모님이라니. 심지어는 남자답게 여러 명에게 당당하게 맞섰다는 것으로 무슨 기숙학교로 보내버리려 하다니. 보는 위치가 다르니 감상도 달랐다. 어렸을 때 볼 수 없던 세세한 부분들이 오히려 눈에 들어오는 게 우스운 일이었다. 집을 나가려던 애가 갑자기 못 들고 간 게임이 생각나서 주사위를 굴리는 일까지.


 추억을 추억으로 만끽하기보다는, 나의 현실과 조응하지 않는 그 세계의 규칙과 갈등을 곱씹으며 볼 수밖에 없었다. 무시무시했던 괴물들이 실상 커서 보니 별거 아니었구나 하는 감상. 생각을 해보면서도 가장 재밌었던 것은 게임에서 등장했던 괴물들의 정체였다. 하나하나 훑어보는데 그들의 성장 환경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글이나 열대 우림 같은 지역에 서식할 법한 괴식물과 곤충들과, 코뿔소를 비롯한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의 함께 튀어나온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게임 속 괴물들의 등장이 결국에는 맨 처음 쥬만지 게임의 시작, 1869년에 쥬만지 게임을 시작했던 백인의 입장에서 두려웠던 것들을 괴물로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국주의의 출발점이니까 어쩌면, 그들의 시선에서 접하는 다른 세상 속 동식물에 느꼈던 원시적인 공포가 게임에 스며든 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단지 이 전설적인 짤방 하나로 모든 설명이 가능한 영화다

 그렇다. 정말로 미친 얘기 같지만 전부 사실이다. 농담을 농담처럼 그냥 넘기지 못하고, 괜히 이죽거리며 트집잡기 시작하는 나는 이젠 정말로 새드엔딩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주사위를 던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괴물이 튀어나오건 뭐 어쩌건 빨리빨리 턴 넘겨서 게임을 끝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도 나이를 먹은 탓이지 않을까. 어렸을 때에는 확실히 과정을 생각하는 게 어려웠다. 주사위를 던지는 순간, 동물들에 쫓기는 순간에 몰입할 뿐이지 요령은 머릿속에 없었다.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몰라도 바라는 모습은 잘 그려볼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고 깨지지 않았다. 과정과 방식을 고민하면서 어른이 되었다. 나를 고집하면 아이가 되고, 고민하면 어른이 된다.


 마냥 이상한 소리들을 늘어놓기는 했지만 지니였고 키팅 선생님이었던 로빈 윌리엄스의 모습을 보는 걸로도 사실은 충분했다. 이따금 너무 많은 규칙과 이유에 지칠 때면 좀 건너뛰는 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어렸을 때처럼 순간만을 사는 것은 아니고 생각만 하는 일이 어른의 현실이겠지만 말이다. 여전히 가야 할 곳에 떠있는 별을 보면 설렌다. 해피엔딩으로 가는 간극을 채우기 위해 상상이 필요할 때면 한 번은 더 이 영화를 찾게 될 거 같다. 단지 그 마지막 칸에 도착해서 해맑게 "쥬만지!" 하고 외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쥬만지'(+나무위키 '쥬만지')

매거진의 이전글 옷 속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