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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Sep 09. 2019

아이야, 이건 너를 위해서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듣기로는 내 사주에는 칼이 들어가 있단다. 칼을 써서 사람을 살리니 의사가 그 이미지에 맞다고 했는데 일단은 그렇게 인생이 쉬운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수학을 그렇게 싫어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수능 다 치고,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찾아봤으니 참 늦기도 한참은 늦었다. 그렇지만 아니라고 냅다 버리기엔 아까운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도구가 있다는 건 쓸 방법만 고민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것도 남에게 해가 되는 도구도 아니고 도움이 되는 도구라고 이야기를 해주었으니 해석을 달리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글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펜을 힘주어 쥐고서는 쓰고 있었다. 펜도 꼭 0.7mm나 되는 뭉툭한 펜촉이 아니라 0.38mm의 세밀한 촉에 더 손이 가는 걸 보면 칼을 잡는 게 운명은 운명인가 보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그렇게 보고 나니까 쥐고 있는 도구에 대해 더 깊게 느끼게 되었다. 마음 가는 대로 휘둘렀던 펜에 힘을 더 줬다. 펜이 감정을 휘둘러 쉽게 치고 나가지 못하게 억누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글 자체가 버거워질 때에 나는 나를 살리지 못했다. 띄엄띄엄 쓰기 시작하니 펜은 무뎌져 있었고, 나는 내 글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블랙 밴디트의 이야기를 다시금 보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궁금한 게 많은 소녀였다. 여느 아이들처럼 쉼 없이 물어봤고, 다리를 다친 로이에게는 일단은 말동무가 필요했다. 거래는 단순했다. 어른은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고 모든 아이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로이는 블랙 밴디트와 영웅들의 이야기를 해준다. 사랑과 복수의 서사시를. 블랙 밴디트와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소녀의 머릿속에서 색색으로 펼쳐졌다. 오디어스 총독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웅들에게서 사랑하는 존재를 빼앗은 악당이었다. 빼앗긴 사랑에 복수하기 위한 영웅들의 모습은 더없이 비장했다. 예리한 칼날과 화약으로 무장한 이들은 강했다. 무엇보다도 강한 의지로 숨 쉬고 있었으니까. 함께 여러 번 고비를 넘겨온 이들은 거친 환경을 넘어서며 복수의 길을 걸었다.


 흥미진진한 모험담은 자꾸만 끊긴다. 알렉산드리아는 불평하지만 언제나 이야기가 재밌어질 때마다, 로이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시킨다. 그렇게 밴디트의 이야기와 모험이 멈추는 지점에서 알렉산드리아의 모험이 시작된다. 메마른 사막도, 푸르른 초원도 아닌 새하얀 병원 속에서 알렉산드리아는 세상 누구보다 진지하게 모험에 임한다. 물건을 가져오고, 뛰어가고, 우연히 다른 이야기를 엿듣기도 한다. 시련을 통해 알렉산드리아는 용감해진다. 이야기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그녀는 훌륭한 밴디트였다. 영웅이 영웅인 이유는 등장해야 하는 때를 잘 알기 때문이다. 어느 이야기에서나 알렉산드리아는 환상적으로 등장한다. 구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회를 준다. 마음속으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다.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던 로이는 사실, 어떤 이야기에서도 행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컸다. 복수를 위해서 죽을 마음을 먹었던 사람은 끝내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이야기를 만든다. 절망과 슬픔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완성되는 건 사랑이었다. 이야기를 만들었던 로이는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쉼 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영화에 나오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야기 밖의 세상에 절망했던 그가 다시금 사랑을 생각하며 변화를 꿈꾸며 이야기는 비로소 행복에 가 닿는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숨 쉬고 있는 이들을 애틋하게 여겨야 한다.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의 용감함을 기억하다 보면 마음에 평온함이 가득 찰 것이다. 절망과 슬픔의 과정을 견디고 주변을 돌아봐주게 만드는 힘이 이야기 속에는 있다. 현실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여도 모든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삶을 닮게 되어있다. 로이와 알렉산드리아의 이야기는 생각보다는 감정이 차오르는 이야기였다. 마음의 구멍이 따스함으로 메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블랙 밴디트의 활약을 보면서 다시금 글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필요한 글로 삶을 이야기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죽음의 기로에서 생각해보는 어떤 이야기는 희망의 문턱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세상을 돌아볼 여지 정도는 준다. 살리는 글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사랑과 복수의 서사시를 는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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