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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Oct 27. 2019

영웅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영화 '다키스트 아워'

 전시 총리. 전쟁 위기 속 등극한 최고 권력자. 국란을 극복할 인물로 택한 이는 선택하고 싶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고심하고 고른 인물. 전적을 생각해보면 온전히 신임하고 일을 맡기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상황은 좋지 않았다. 히틀러는 야심을 여지없이 드러냈고,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대응책이 필요했다. 새로이 총리에 부임할 그는 고집 센 늙은 이, 능수능란한 정치가, 연설가이자 달변가였다. 전시 총리 자리는 보상인지, 복수인지도 불분명한 위태로운 자리였다. 자칫 전임자의 그늘에 가려 구관이 명관이라는 소리나 듣기 쉬운 위치였다. 조금은 복수에 더 가까운 자리였을지 모른다. 모르지 않는다. 호락호락하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처칠은 그런 사람이다. 처칠은 그렇게 총리 자리에 앉게 된다.


 처칠이 호의적인 환경 속에서 위치에 올라서게 된 건 아니란 게 확실했다. 위기가 코앞에 닥쳐 있었어도 의견이 분분했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위인전, 역사책에서 봤던 그의 모습은 승리의 사인을 그리며 전쟁의 승리자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단순히 승리의 이미지로만 각인되었던 처칠이라는 사람의 흔적은 처절한 분투의 과정이었다. 이미지에 덧씌워진 환상을 걷어낸 영화. 지금 이 시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세밀하게 체에 걸러진 역사적 사실이 영화가 될 수 있었을까. 위인이라는 위치, 보고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형태로 우상화된 개인이 오히려 인물을 더 작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선과 악이라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 통용되던 개념 속에서의 인물상과는 전혀 다른 '처칠' 개인에 대한 모습이 돋보였다.


 전시 총리라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크고 작은 전투에서 패배한 전과가 많았던 점도 그랬다. 지나가듯 흘려 넘길 수 있었던 이야기 또한 확실하게 짚으면서 이야기는 노선 정리를 확실하게 했다. 전쟁의 영웅이 아닌, 한 사람의 정치가로서 그의 면모를 다각적으로 풀어헤친 영화였다.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전쟁의 시기에는 언제나 영웅이 돋보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영웅적인 면모를 바란다.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그렇게 한 편의 영웅담으로 만들어진다. 다만 시간은 호의적이지 않다. 시시때때로 전황은 급변하고, 리더십은 언제나 도전받는다. 이기는 방법은 고사하고, 살아남는 방법부터 고민해야 했다.


 전쟁이라 해서 모든 사람이 단일한 의견을 갖는 건 아니다. 전시나 평시나 결국, 사람들이 시대를 만든다. 한 편의 정치 드라마로 상황은 체스 게임처럼 일진일퇴를 거듭한다. 각자의 편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홀로 고군분투하는 처칠의 모습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 이전에 총리를 했던 체임벌린과 조지 6세 국왕이 큰 역할을 한다. 애초에 국왕은 그와는 다른 종류의 담배를 물고 있었다. 두터운 시가와는 정반대로 얇디얇은 담배. 총리는 시가를 피우고, 국왕은 담배를 태운다. 영화에서 처칠이 총리로 임명되어 국왕을 독대하는 장면에서 빛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방향을 비추고 있는 것도 그런 재미난 포인트 중 하나였다.


 영화는 물리적인 시간을 표기하며 관객을 압박한다. 한 달, 몇 년 후의 이야기처럼 이상적이지 않다. 하루하루, 며칠 단위로 상황이 바뀐다. 그 속에서 처칠의 분투는 눈물겹다. 마치 당시를 살았던 국민의 한 사람이 된 것처럼 몰입하게 만든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얹는다. 며칠 단위로 전시 상황이 급변하는 과정 중에 처칠을 중심으로 화면이 줄어든다. 가장 급박할 때, 본토가 침공을 받을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그는 화장실로 도피한다.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온통 적으로 둘러싸인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작은 프레임 속에서 상황은 극도로 좁아진다. 희망을 걸었던 마지막 선택지마저 증발한 상태로 앉아있던 그의 모습은 그래서 흥미로웠다. 반전의 선택이 없다고 생각될 즈음에 다시금 처칠은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고, 이는 확실한 카타르시스로 보답한다.


 냉엄하게 바닥을 마주하면 결국, 모든 상황과 조건을 재점검할 수밖에 없다. 당연했던 모든 일에 의문을 들이고 일상 속에 도태되었던 날카로운 감각을 벼려낼 때 최선의 수가 튀어나온다. 본능이 가리켰던 선택을 돌이키며 담대하게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때 개인의 선택은 국가의 역사가 된다. 단지 한 사람의 놀라운 능력이 이 모든 역사를 만들었다 할 수 없다. 그의 주변에서 일했던 모든 사람들, 옷깃을 마주쳤던 시민들, 대소 관료와 왕실 모두의 저력이 세심하게 돋보였다. 그만큼 처칠의 연기도 확실했고, 능력도 명확했다. 위트 있게 그는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독보적인 능력을 보였던 천재들은 많았다. 다만, 그들이 모두 영웅은 아니다. 어떤 이들이 영웅일까? 영웅은 타고나는가? 만들어지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인가. 영웅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다키스트 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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