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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Nov 09. 2019

아득바득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영화 '패터슨'

 가족의 일상을 만들어가는 일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라 생각했다. 포부나 꿈을 갖기에 부족하다는 생각도 해봤다. 딱히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도 그저 뭔가 노력을 하다 보면 이룰 수 있는 정도라고 봤다. 계절 별 가족의 일상은 정해져 있었고 지극히 단순했다. 저 정도 돈을 버는 일이나, 가족을 만드는 일쯤이야라고 생각했다. 사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갖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그렇다. 현실이 쏘는 주먹은 생각보다 더 얼얼했다. 차마 외면하고 싶었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손맛이었다. 저 멀리 창문 너머로 보는 산의 크기가 짐작이 가지 않듯이, 정작 입산 직전의 심정에 처하자 삶은 막중한 무게로 다가왔다. 그러다 이 영화를 골라서 보게 되었다. 일단은 일상을 다루는 영화라고 하니 지루하거나 당연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갖고 펼쳐본 패터슨씨의 일상은 이상하게 달랐다.


 패터슨 시의 패터슨씨는 버스 운전사다. 핸드폰은 없고, 손목시계만 들고 정확하게 하루를 사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또한 시인이다. 오고 가며 느꼈던 삶의 감정을 일상적인 언어로 담아낸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쓰는 글은 아니지만, 노트 속에 조각된 일상은 각기 다른 색을 더한다. 그는 과묵한 편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귀 기울이는 사건이나 관찰하는 사연들은 더 크게 들리고 보인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이 느꼈던 바를 노트에 쓰는 버스 운전사의 이야기가 뭐라고 다를까. 감동을 쥐어짜는 슬픔이나 데굴데굴 굴러다닐 정도로 우스운 순간들 사이 어딘가에 일상이 존재한다. 영화는 적어도 그 지극한 극단의 감정을 말한다. 그에 반해 패터슨은 영화 같지 않은 일상을 살아간다.


 패터슨 시의 패터슨씨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어디선가 그와 같은 사람을 마주칠 거 같은 생각이 든다는 점. 어렸을 때에 해리 포터를 보고 나서 들었던 감정과 비슷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어디선가 실존할 거 같은 사람. 확실히 마법사가 아닌 버스 운전사라면 훨씬 더 현실적이긴 하다. 해리 포터가 어디인가 있을 거 같은 느낌이었던 건 '나만큼은' 마법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조건이 맞거나 한다면 저런 생활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러움과 그래도 나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패터슨의 이야기를 보면서 들었던 감정이 비슷한 건 어릴 적과 같았다. 일상. 지극히 평범한 관성 속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 중에 나는 다를 거라 생각했다.


 일상에서 누리는 조건과 환경이 부러웠다기보다는 그가 일상이라는 조건을 누리는 마음 가짐이 부러웠다. 별다른 호들갑 없이 흔들리지 않는 삶. 때에 따라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가 휘몰아쳐도 다시금 일상 속으로 복귀할 수 있는 굳은 관성이 있었다. 운동선수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훈련장으로 되돌아오듯, 패터슨씨의 일상도 그랬다. 삶은 늘 같지만은 않고, 크고 작은 형태로 우리를 뒤흔드나 돌아와야 하는 건 '언제나' 일상이다. 자의로 정하지 않은 계획과 일정 속에 나의 일상은 얼마나 나의 의지로 충만한지 고민하게 만든다. 요란하지 않아도 시간은 늘 같으니 그 안에서 맞춰가며 선택하는 삶은 이다지도 아름답다.


 그의 일주일을 보고 나니 패터슨씨의 삶이 그 자신만의 것으로만 채워져 있었다면 심심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란하게 떠들기보다는 홀로 감정을 정리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지켜보고 때론 응원하며 본인의 삶을 채웠다. 꼭 말을 통해 전해야 진심일까. 그는 표정으로도, 경청하는 모습으로도 자신의 삶을 썼다. 꼭 어떤 조건이나 상황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평범하게 행복한 선택들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 로라와 반려견 마빈과 함께. 가족의 일상은 서로가 서로를 더한다. 이상 속 삶을 그리는 모습은 결국 한 사람의 일상만으로 그려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일상에 일상을 더해 이상을 꿈꾸고 그렇게 상상이 번진다.


 올라가는 크레딧을 보면서 예전에 한번 들었던 행복학개론이라는 수업이 생각났다. 종강할 무렵 교수님이 수업을 듣고 행복해졌냐는 질문을 던지셨다. 꼭 수업 때문은 아니었어도 충분히 행복한 막 학기 생활이었다. 교수님의 질문은 뻔한 질문이었어도 듣지 않고 넘어갔다면 아마 생각 없이 일상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수업의 목표가 일반적으로 정의되는 행복이 아닌 자신의 삶에 맞춰 정의 내리는 행복을 찾아보는 일이었으니까. 삶이라는 관성에 무너지기 전에 끊임없이 그 명제를 머릿속으로 되뇌어야 했다. 조건이나 환경을 떠나 주어진 삶의 범위 안에서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 돌이켜보면 내겐 그 일이 행복이었다.


 요리할 때 맛있어지라고 주문을 거는 것처럼, 지난한 일정표와 따박따박 박혀오는 타자 소리를 견디며 삶은 행복해질 것이다. 저녁 시간의 맥주 한 잔에 일상의 소회는 가볍게 털고, 그러고 나면 또다시 아침 여섯 시면 해가 뜰 테니. 너무 아득바득 행복해지려 하지만 말자.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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