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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 Oct 27. 2022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

수십 년의 감내

여자로 태어나 감내해야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 습관이 되어버려 이제는 감내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들. 예를 들어 헤어질 때는 그게 몇 시가 되었건 '조심히 들어가'라며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 공중 화장실에서 주변을 둘러보기 전엔 바지를 내리지 않는 것. 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지만 단연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월경을 고르고 싶다.


월경이란 평균적으로 28일을 주기로 5일간 피를 쏟는 일(정확히는 착상되지 않은 자궁내막이 탈락되어 떨어져 나오는 것)을 말한다. 모든 여자는 빈혈이 조금씩 있다는 말을 할 정도로 월경은 여성의 건강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PMS(월경전 증후군)는 나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질병 중 하나다.


우선 가슴이 딱딱하게 뭉치고 아프기 시작하면 PMS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다. 이어서 아랫배와 골반통이 나타났다가 극심한 무기력증과 피로, 우울감이 덮치고 나면 대망의 마지막 단계, 바로 설사가 시작된다.


하루 이틀로 끝나는 수준이 아니라 나는 거의 월경이 끝날 때까지 계속 설사를 하는 편인데 이게 아주 죽을 맛이다. 집에 가만히 있을 때면 몰라도 스케줄이 있는 사회인이다 보니 바로바로 화장실을 가기도 애매한 때가 반드시 생기고, 그마저도 방금 다녀왔는데 다시 그분의 부름을 받아 재빨리 화장실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생긴다.


집에만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수시로 부글거리는 뱃속에 뭘 먹어도 금방 체하기만 하고, 먹은 건 없는데 밀려 나오는 건 끝나질 않으니 살이 쭉쭉 빠지고 얼굴이 핼쑥해진 내 모습을 한 달에 한 번씩 거울로 마주할 뿐이다.


월경 중 설사를 하는 일은 드물지 않은 증상인데 장트러블 좀 앓아봤다 하는 사람들이라면 달에 며칠 씩 준비된 장트러블을 마주해야만 하는 이 심리를 가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월경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과 자궁이라는 내 몸의 일부를 향해 아무리 욕을 읊조려봐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 그저 화장실과 방을 열심히 들락거릴 수밖에.


그러다 얼마 전 조금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됐다. 월경을 조금 앞둔 어느 날 화장실에 앉은 내가 월경이 시작되길 빌고 또 빌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혐오하던 월경을 왜 그리도 애타게 찾았을까. 예상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이름하야 '변비'의 강림 때문에 며칠간 고생하던 중 번뜩 "그래, 월경이라면!" 하는, 히어로의 등장을 바라는 히로인처럼 지겹고도 지겨운 월경이 시작되기를 빌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식습관이 좋지 못해서 어릴 때부터 종종 변비를 앓고는 했는데 어느 순간 PMS에 설사가 등장하게 되면서 변비가 달에 한 번 꼴로 쑤욱 꺼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이것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처럼 변비가 두렵지만은 않다. 월경이 시작되면 나의 지독한 PMS의 여파로 묵은 고통들이 해방될 테니까.


묵은 변비를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PMS라니 도대체 월경 너는 뭐냐 싶다가도 그래도 어쨌든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으니 잘 된 건가 위로해보기도 한다. 월경은 분명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고 완전한 예측이 불가하다는 점에서 나를 철저히 무력화시킨다. 고통스럽고, 짜증 나고, 찝찝함이 모든 감각을 압도한다. 그럼에도 살다 보니 내가 월경을 기다리게 되는 날도 온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내게 있어 월경은 불행인데 변비로 답답한 장에게는 행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토끼 탈을 쓴 사람이

복도를 달린다

사람들은 숨어버리고

왜 다들 숨는 거예요

토끼 탈을 쓴 사람이 묻는다

당신 귀가 너무 커서요

사람들이 대답한다

토끼 탈을 쓴 사람은

토끼 탈의 귀를 자르고

다시 복도를 달린다

사람들은 여전히 숨어 있고

당신은 누구죠

나는 토끼입니다

당신은 귀가 없어요

토끼일 수 없어요

그럼 나는 누구죠

그럼 나는

귀가 잘린 토끼 탈

얼굴 하나 덩그러니 놓인

고요한 복도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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