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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 Oct 29. 2022

너무 무거우면

바람을 타고

어쩐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것. 남북 휴전선, 방금 막 들어온 월급 통장 그리고 엄마. 어릴 때는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키가 크고, 제일 요리를 잘하고, 제일 예쁘고, 제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라면서 변화된 생각도 있고 (앞의 두 가지)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뒤의 두 가지).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무능한 남편을 만난 엄마의 생활력은 측정이 불가할 정도로 매우 높은 수준인데 특히 남에게 도움받는 것을 유난히 꺼리는 편이다. 엄마는 벼랑 끝까지 내몰린 끝에야 겨우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그마저도 가슴을 치며 한스러워하는 사람이다. 내가 엄마를 멋지게 생각했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점이었다. 저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겁을 먹을 정도로 나는 엄마를 닮고 싶었다.


억척스럽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스스로에게 모진 삶을 살아온 엄마를 양분으로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엄마는 원래 강하니까, 내가 힘들 때 늘 기댈 수 있으니까, 내가 어떤 인간이라도 받쳐줄 사람이니까. 그런 바보 같은 안도가 엄마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렸다. 빗길에 일을 마치고 귀갓길을 서두르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 엄마를 보러 가면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내가 나잇값을 했다면, 버팀목을 내게로 옮겨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입원기간 동안 엄마는 거의 침통해했다. 한쪽 팔다리를 모두 가누지 못한 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극도로 제한된 삶이 엄마에게는 너무나 힘들게 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 어린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면목이 없다고, 창피한 일이라고. 엄마는 내내 걱정과 도움의 손길을 부끄러워했다.


도움받는 일을 부끄러워하게 만든 것은 결국 나의 책임이다. 엄마의 삶에 그만한 도움과 위로를 건네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가 혼자가 아닌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의 책임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엄마의 머리를 감기고, 얼굴을 닦이고, 반찬을 올려주었다. 죄를 사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 수행하는 수도승처럼 나는 묵묵히 병원에 한 달을 있었다.


누구보다 묵묵히 지난한 시간을 견뎌온 것은 결국 엄마일 테므로 나는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위로의 면피를 쓴 괴로움으로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빈틈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결했던 엄마의 틈새가 서서히 벌어지는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조금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차원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이 머리를 윙윙 가로지었다. 이부자리를 똑바로 정리하거나, 물을 열어 마시고,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의 당연한 것들이 버거워 황망해진 엄마를 지켜볼 때마다 틈새는 조금씩 크게 더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하루는 잠결에 거실로 나와 물을 마시려는데 테이블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곧이어 엄마가 어디선가 수건을 가져와서는 테이블을 쓱쓱 닦아내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무거워서 쏟았어."

"그러게 왜 오른손을 써."

"왼손으로 해도 꽉 찬 건 힘들어."

"나 시키지."

"너 자잖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걸레질을 끝낸 수건을 한쪽 옆으로 밀어두었고, 그 사이 나는 컵에 물을 따라 엄마에게 슬쩍 내밀었다. 내가 잠을 자는 사이 엄마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나는 잠들기 전 물병의 뚜껑을 한 번씩 돌려보곤 했는데, 2L의 물이 가득 든 물병을 성치 않은 팔로 들어 올릴 엄마의 고생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편협한 시각에 대한 자책감과 뭐든지 혼자 하려고만 하는 엄마에 대한 야속함으로 심란해진 상태로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보면 비슷한 일들이 종종 있었다. 찌개를 데우기 위해 간 부엌에서 깨진 밥그릇을 발견하거나 유난히 짠맛이 강한 반찬을 씹는 일. 엄마는 내가 잠을 자거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뭐든지 혼자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수련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나한테 좀 시켜. 혼자 다 하지 말고."

"혼자 할 수 있는 건 혼자 해야지."


그 확고한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로는 결코 그 틈이 매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에. 오직 엄마의 의지만이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넌지시 이해했으므로.


"장 봐야 돼."


외출이 어려워진 엄마는 동네 마트의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기 시작한 참이었다. 나는 마트 어플을 켜고 엄마가 부르는 목록을 하나하나 장바구니에 담아 넣었다.


"엄마."

"응."

"물을 작은 걸 살까? 그건 안 무겁잖아."

"그럴까? 그거 좋은 생각이다."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도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200ml 생수 12통 패키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엄마는 이어서 작은 물을 사면 얼마나 효율적 일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신 네가 물 따느라 바쁘겠네."

"그건 나밖에 못 하지?"


엄마가 웃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곳곳에서 엄마를 걱정하는 전화들이 몰려들었다. 소액이나마 수술비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며 도움의 손길을 주는 분들도 나타났다. 엄마는 모든 마음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처음엔 한심한 자신의 꼬리표처럼 느껴지던 빈틈의 구덩이가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의 손길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동안 엄마의 안에도 무언가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엄마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물이 반쯤 남은 물병을 들어 밥을 먹는 내게 물을 따라주었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대단하지?" 제법 으스대며 내게 물컵을 내밀었다. 나는 물컵을, 엄마의 빈틈에서 새어 나온 의지를 받아마시며 다시 생각했다. 여전히 나는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엄마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그러니까 엄마가 도움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빈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더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기를. 한 모금씩 넘어가는 물길에 맞춰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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