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거실 창을 활짝 열어놓고 서 있다. 웬일인지 담배도 피우지 않은 채 멍하니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아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선다. 창가를 밟고 거칠게 튀어 오른 빗물이 교복의 치맛자락을 적시지만 개의치 않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묻는다.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나는 답한다. "응. 소리가." 그러자 그는 흐뭇한 얼굴로 대꾸한다. "아빠도."
그 흐뭇함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한동안은. 내가 비를, 정확히는 빗소리를 좋아하는 것이 어째서 그의 얼굴에 흐뭇함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그는 드물게도 편안해 보였으며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고, 온화하고 충만한 열기가 서서히 치마를 적셔오는 빗물처럼 나에게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그건 아주 드문 일이어서, 나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를 보면서도 늘 그 순간의 그를 떠올리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었다. 그는 죽음으로 인해 그 이미지를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내가 그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아득한 상념처럼 남겼다.
그는 지독히도 외로운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을 에워싼 빗소리에서 멈추지 않는 생명력을 느꼈는지 모른다. 혹은 늘 광기에 불타던 머릿속이 빗소리로 인해 호흡을 가다듬느라 아주 짧은 동면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단순히 내가 그의 곁에 서서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을 수도 있다. 추측컨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단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위로받고 있었다.
빗소리가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핑크 노이즈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저기압, 세로토닌 분비의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나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 빗소리를 좋아한대."라고만 말했다. 나는 그의 말도 맞다고 생각한다. 외로운 사람은 보라색도 좋아한대, 라는 말은 속엣말로 삼켰다. 그는 보라색을 좋아했다. 나 역시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외로움과 더불어 너 역시 외로우냐는 질문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와 같이 외롭다는 사실이 그의 얼굴에 흐뭇함을 띄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나는 맥없이 누워 천장에 빗물을 가만히 그려보곤 했다.
비가 올 때면 늘 그 대화가, 축축하게 젖어가던 교복 치마가, 그리고, 도무지 도망치고 싶어지는 그 흐뭇한 얼굴을 떠올린다. 그 상념은 때때로 나를 울렸고, 가끔은 나를 거칠게 밀쳤다가, 대체로 외롭게 만들었다. 외로움이 겹치고 겹치다 보면 그제야 그것이 외로움을 포갠 채 쏟아지는 위로의 빗방울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그러면 나는 잠에 들 수 있었다.
할머니와 나란히 식탁에 앉아 조그마한 부엌의 창문으로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는 모습을 내다보고 있을 때도 나는 그 대화를 생각했다.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응. 좋아. 좋아. 좋아. 좋아. 그러니까...
번쩍.
"할머니 번개 쳤다."
"그러게. 비가 많이 온다."
할머니와 나는 나란히 시계를 봤는데 엄마가 올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빗길에 천천히 오느라 그런 걸 거라고 할머니를 다독이고 꿋꿋이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나는 결국 포기를 선언하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충전기에 꽂아둔 핸드폰을 들어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엄마."
"엄마 오늘 늦어. 못 들어가. 할머니랑 밥 먹어."
"왜?"
"그런 일이 있어. 끊어."
엄마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오랜 기다림의 결과가 겨우 "끊어" 한 마디로 끝날 수 있음이 허탈했다. 할머니는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못 온대. 우리끼리 밥 먹으래요."
"같이 먹어야지."
"그렇지. 일단 기다려볼까?"
엄마는 거짓말을 안 한다. 태생적으로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못 온다면 못 오는 게 맞는 거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고집을 부려 엄마를 기다렸다. 9시가 지나갈 때까지도. 엄마의 소식을 들고 온 이모가 올라와 할머니와 나의 밥을 강제로 챙겨 먹이지 않았다면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밤새 뜬눈으로 엄마를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태생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음 날 병원에 찾아갔을 때 엄마는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어색한 V자 모양으로 누워 있었다. 빗길에 엄마가 탄 오토바이와 앞서 가던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해 엄마의 몸 곳곳이 부러지고 찢어져 있었다. 응급처치는 끝난 상태였지만 통증 때문인지, 약 때문인지, 엄마는 조금 까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행이라면 자동차 쪽 사람들은 다친 사람이 없어서 안전히 서울로 돌아가셨다는 것 정도였을까.
밖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가에 툭, 툭, 떨어지면서 자꾸만 물어왔다.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엄마가 수술을 하고 후속 치료를 할 때까지 한 달이 넘게 입원해 있는 동안 거의 매일 비가 내렸다. 잠자리에 누우면 창밖으로 빗소리가 리듬이라도 타듯 맹렬하게, 그러다가 온화하게, 다시 춤을 추듯 흩날렸다.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네 엄마를 저렇게 만들었는데도. 응. 좋아. 나는 밤마다 보호자 침대에 지쳐 널브러진 채 여전히 빗소리에 위로받고 있었다. 엄마를 저렇게 만든 비에게마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미워해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비에 잠겨 있던 탓에 그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흐뭇한 얼굴이 눈앞에 선명했다. 화가 나고, 억울했다. 나는 이제 그의 흐뭇한 얼굴을 떠올리며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한껏 오해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