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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 Aug 11. 2022

빗소리가 언제까지 위로가 되어줄까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나에겐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한 사람이 거실 창을 활짝 열어놓고 서 있다. 웬일인지 담배도 피우지 않은 채 멍하니 비 오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아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며 선다. 창가를 밟고 거칠게 튀어 오른 빗물이 교복의 치맛자락을 적시지만 개의치 않는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묻는다.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나는 답한다. "응. 소리가." 그러자 그는 흐뭇한 얼굴로 대꾸한다. "아빠도."


그 흐뭇함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한동안은. 가 비를, 정확히는 빗소리를 좋아하는 것이 어째서 그의 얼굴에 흐뭇함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그는 드물게도 편안해 보였으며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고, 온화하고 충만한 열기가 서서히 치마를 적셔오는 빗물처럼 나에게까지 번져오고 있었다. 그건 아주 드문 일이어서, 나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를 보면서도 늘 그 순간의 그를 떠올리며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었다. 그는 죽음으로 인해 그 이미지를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내가 그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아득한 상념처럼 남겼다.


그는 지독히도 외로운 사람이었으므로 자신을 에워싼 빗소리에서 멈추지 않는 생명력을 느꼈는지 모른다. 혹은 늘 광기에 불타던 머릿속이 빗소리로 인해 호흡을 가다듬느라 아주 짧은 동면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단순히 내가 그의 곁에 서서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을 수도 있다. 추측컨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는 죽었다. 하지만 단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순간 그는 위로받고 있었다.


빗소리가 안정감을 주는 이유는 핑크 노이즈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저기압, 세로토닌 분비의 감소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나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 빗소리를 좋아한대."라고만 말했다. 나는 그의 말도 맞다고 생각한다. 외로운 사람은 보라색도 좋아한대, 라는 말은 속엣말로 삼켰다. 그는 보라색을 좋아했다. 나 역시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외로움과 더불어 너 역시 외로우냐는 질문도 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와 같이 외롭다는 사실이 그의 얼굴에 흐뭇함을 띄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나는 맥없이 누워 천장에 빗물을 가만히 그려보곤 했다.







비가 올 때면 늘 그 대화가, 축축하게 젖어가던 교복 치마가, 그리고, 도무지 도망치고 싶어지는 그 흐뭇한 얼굴을 떠올린다. 그 상념은 때때로 나를 울렸고, 가끔은 나를 거칠게 밀쳤다가, 대체로 외롭게 만들었다. 외로움이 겹치고 겹치다 보면 그제야 그것이 외로움을 포갠 채 쏟아지는 위로의 빗방울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그러면 나는 잠에 들 수 있었다.


할머니와 나란히 식탁에 앉아 조그마한 부엌의 창문으로 창밖으로 비가 쏟아지는 모습을 내다보고 있을 때도 나는 그 대화를 생각했다.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응. 좋아. 좋아. 좋아. 좋아. 그러니까...


번쩍.


"할머니 번개 쳤다."

"그러게. 비가 많이 온다."


할머니와 나는 나란히 시계를 봤는데 엄마가 올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빗길에 천천히 오느라 그런 걸 거라고 할머니를 다독이고 꿋꿋이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나는 결국 포기를 선언하고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충전기에 꽂아둔 핸드폰을 들어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엄마."

"엄마 오늘 늦어. 못 들어가. 할머니랑 밥 먹어."

"왜?"

"그런 일이 있어. 끊어."


엄마는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오랜 기다림의 결과가 겨우 "끊어" 한 마디로 끝날 수 있음이 허탈했다. 할머니는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못 온대. 우리끼리 밥 먹으래요."

"같이 먹어야지."

"그렇지. 일단 기다려볼까?"


엄마는 거짓말을 안 한다. 태생적으로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못 온다면 못 오는 게 맞는 거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괜히 고집을 부려 엄마를 기다렸다. 9시가 지나갈 때까지도. 엄마의 소식을 들고 온 이모가 올라와 할머니와 나의 밥을 강제로 챙겨 먹이지 않았다면 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밤새 뜬눈으로 엄마를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태생적으로 고집이 센 사람이다.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음 날 병원에 찾아갔을 때 엄마는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어색한 V자 모양으로 누워 있었다. 빗길에 엄마가 탄 오토바이와 앞서 가던 자동차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해 엄마의 몸 곳곳이 부러지고 찢어져 있었다. 응급처치는 끝난 상태였지만 통증 때문인지, 약 때문인지, 엄마는 조금 까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행이라면 자동차 쪽 사람들은 다친 사람이 없어서 안전히 서울로 돌아가셨다는 것 정도였을까.


밖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가에 툭, 툭, 떨어지면서 자꾸만 물어왔다.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엄마가 수술을 하고 후속 치료를 할 때까지 한 달이 넘게 입원해 있는 동안 거의 매일 비가 내렸다. 잠자리에 누우면 창밖으로 빗소리가 리듬이라도 타듯 맹렬하게, 그러다가 온화하게, 다시 춤을 추듯 흩날렸다. 너도 비 오는 게 좋니. 네 엄마를 저렇게 만들었는데도. 응. 좋아. 나는 밤마다 보호자 침대에 지쳐 널브러진 채 여전히 빗소리에 위로받고 있었다. 엄마를 저렇게 만든 비에게마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미워해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비에 잠겨 있던 탓에 그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흐뭇한 얼굴이 눈앞에 선명했다. 화가 나고, 억울했다. 나는 이제 그의 흐뭇한 얼굴을 떠올리며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한껏 오해하기로 했다.


미워할 수는 없어도 사랑하지는 않기 위해서.




당신은 비가 오는 게 좋은가요?

저는, 아니요, 더 이상 그리움은 잃고 싶어요.

저는, 아니요, 더 이상 외로움은 잊고 싶어요.

저는, 아니요

더 이상

민들레가 짓밟히는 땅바닥

그 밑바닥 꼬물대는 지렁이 청개구리

빈 새의 둥지 미끄러지는 전깃줄 정전

눈치보는 너구리 멧비둘기 꽁지깃

비가 사랑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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