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빛 Jan 01. 2022

이상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꿈이냐, 안정이냐

 2016년 1월 5일 오전 10시, 먹구름으로 어두컴컴한 노량진 고시원 단칸방에서 세 번째 임용고시 불합격을 확인한 후 조용히 노트북 전원을 껐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지도안, 면접 대본 등 임용 2차 시험 준비 자료가 모두 휴지 조각이 되었으니 더 이상 노량진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2016학년도 임용 고시생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생각에 '노량진'이라는 공간과 강력한 이질감이 들어 일 초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졌다.


 즉시 우체국 택배 예약을 하고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 큰 박스를 대여섯 개 구해 고시원에 있는 모든 짐을 황급히 쑤셔 넣었다. 개미 한 마리도 없이 고요한 고시원에서 혼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의문이 들었는지 고시원장님이 어디 가냐고 여쭤보셨다.


 "이제 집에 내려 갈게요."


 담담한 표정과 건조한 목소리에 아무 말 없이 끄덕이셨다.


 10개월가량 살던 집이었기에 야금야금 쌓인 짐이 어마어마했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터라 낑낑대며 무거운 짐을 5층부터 1층까지 부지런히 날랐다. 모든 짐을 부친 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편을 끊고 아무 감정 없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집에 간다는 설렘이 컸던 탓인지 스스로가 처한 현실이 무감각해졌다. '드디어 집에 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늘 아침 확인한 문구는 먼 옛날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집. 모두가 잠든 시간에 현관문 불이 켜졌다. 하루 종일 닫혀 있던 목구멍을 비집고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무거운 가방을 털썩 내려놓고 안방으로 걸어갔다. 잠들었던 엄마, 아빠가 현관문 소리에 일어나 계셨다.


 "응, 딸 왔어?"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두운 방 안에서 확인했던 불합격 문구가 떠오르며 허망한 감정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집에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다. '불합격'했기에 어쩔 수 없이 패배한 몸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실패'라는 현실이 물밀듯 덮쳐 왔다. 그 순간 할 수 있는 것은 엄마 품에 안겨 우는 것뿐이었다.


 "딸, 고생했어. 얼른 씻고 자."


 노량진 수험생활은 엄마의 따뜻한 말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눈을 뜬 아침.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눈물만 계속 흘린 탓에 손이 버석버석 말라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다. 도대체 뭘 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세상에 나를 위한 자리는 단 한 곳도 없구나.'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굳어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거짓말 같은 기회가 눈앞에 찾아왔다.


 아버지는 그 해, '국가유공자'가 되셨다. 재직 중인 직장에서 표창도 받으시고 근속 년수를 인정받으시는 등 여러 공로로 인해 귀한 칭호를 선사받으신 것이다. 딸의 불합격 소식에 더 이상은 가만히 계실 수 없으셨던지 백방으로 방법을 알아보던 중 면 단위의 중소기업에 '국가유공자 특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시고는 나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셨다.


 우리 집은 엄청난 고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정확히 두 입장으로 나뉘셨다. 아버지께서는 고민할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하셨다. 교사가 정말 본인의 길이라면 세 번의 시험 중 단 한 번이라도 1차 합격을 따냈어야 했다는 것, 그러나 한 번도 1차를 통과한 적이 없으니 교사는 너의 길이 아니라는 것, 게다가 이런 자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흔히 오지 않는 기회라는 것. 일리 있는 말들로 평생 교사 말고는 다른 직업을 생각한 적이 없던 나에게 새로운 인생길을 제시하셨다.


 반면, 어머니께서는 생각이 달랐다. 물론 좋은 기회인 것은 맞지만 인생은 너무나도 긴 여행이므로 본인이 정말 원하는 일이 있는데 포기해버리고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일을 선택해버린다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는 말로 아버지와 설전을 펼치셨다.


 '주어진 기회를 꽉 잡고 평생 꿈꿔왔던 일과는 전혀 딴판인 일을 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이 평생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을 살며 임용이라는 허황된 꿈을 좇을 것이냐'라는 갈림길에 망연히 놓였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모두 내가 불합격했기 때문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지만 이틀 내로 결정해야 한다는 현실이 더 나를 몰아붙여 괴롭게 만들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이 거대한 일을 결정할 수 없었다. 정말 친한 친구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다. 친구들의 반응은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한 친구들은 더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했다. 요즘 취업이 얼마나 힘든데, 꿈이야 까짓 껏 현실에 발맞춰 열심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잊혀질 거라고 했다. 이뤄지지 않는 이상만 좇다가는 모두가 자리 잡는 모습을 본 후에, 뒤늦게 후회할 수도 있다는 뼈아픈 조언을 해 주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세 번의 기회를 모두 날린 한심한 임용 수험생이었으니까. 당장 기간제 자리라도 잡을 수 있는지 전혀 불분명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제안하신 일자리는 둘도 없는 소중한 기회라고 말해주었다. '혹여 임용에 합격하여 교직 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 내가 선택한 이 길을 후회하면 어쩌지?'라는 쓸데없는 나의 걱정에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그런 마음이야 일시적으로 들 수 있겠지만 세상에 자기 전공대로 사는 사람은 별로 없으므로 새로운 직장에 충실하다 보면 곧 괜찮아질 것이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었다.


 다른 친구들은 정 반대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기회를 잡아 취업에 성공한들, 진정으로 행복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쏟아부은 체력과 시간, 노력, 정성이 얼만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그저 '안정'만 택하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냐고 했다.


 그 순간, '아버지의 제안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생각이 걷히고 내면에 꽁꽁 숨어있던 진정한 바람과 마주하게 되었다. 세 번째 불합격과 맞닥뜨린 후 머릿속에 '교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각인되어 있었다. 누군가 단 한 번이라도 나에게 '계속 도전하면 언젠간 될 수 있어.'라는 말을 해줬으면 했던 것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은 큰 축복이며 우리는 아직 어리므로 기간제나 강사 자리를 구해 임용에 계속 도전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에, 아무도 없는 카페 구석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나의 향후 거취는 나름 주변 사람들에게 소소한 '이슈'였다. 끝내 그 자리는 더 적합한 누군가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소중한 기회를 얻어오신 아버지와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준 몇몇 친구들은 아쉬움을 보였다.


 나를 한번  믿어보기로  끝에,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힘든 취업 시장에서 안정적인 정규직을 버리고 '기간제 교사'로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지금도 그 순간을 가끔 돌이켜본다. 늘 '임용합격', '교사'를 인생길의 표지판에 붙여 놓고 앞만 보고 달려온 나로서는 가장 큰 갈림길을 맞닥뜨린 셈이었다. 어떤 길이 나에게 적합하고 올바른 방향이 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짙은 안갯속 숨이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져다주신 소중한 기회를 내려놓고 진정한 마음의 울림을 따라 이상을 계속 좇은 끝에 선택한 기간제 경험은 현재 교직 생활을 성숙하게 꽃 피울 수 있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물론 누군가 이런 기회를 얻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덥썩 집어들어야 하는 행운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줄곧 교사의 꿈을 갖고 살아왔으며 대학생활, 산속 고시원, 독서실, 노량진 고시원을 지나는 동안 교사 이외의 직업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탓에 마음 깊은 곳의 진심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었다.


 나에게 진실 어린 조언을 해준 아버지와 어머니, 모든 친구들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다. 비록 걱정해준 것과 반대의 선택을 했더라도 그들은 나의 판단을 충분히 존중해 주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 많은 이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불확실한 길을 선택했지만 그 덕에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며 행복감을 느끼는 교사가 되었다.


 '이상이냐, 현실이냐'하는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결코 틀린 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 보고 무엇을 더 참된 가치로 두는지 깨닫고 그 울림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안갯속에 꽁꽁 갇힌 '이상'을 선택하였으나 정말 운 좋게도 '옳은 선택을 했구나'라고 그 순간을 회상하는 지금에 감사하며 지낸다. 그때의 갈림길이 있어 지금의 삶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꿈을 품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시작하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속에
당신의 천재성과 능력과 기적이 모두 숨어 있다.
-괴테


이전 02화 스물 다섯, 스물 여섯의 나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