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빛 Oct 21. 2021

마음에 등대를 세우다

수험생 일기를 넘겨 보며

 수험 생활을 시한부 인생처럼 살아가며 하루하루 피폐해짐을 온몸으로 느끼던 노량진 고시생은 어느새 대입 수험생과 함께 스트레스에 밤잠 설치는 평범한 4년 차 고3 담임교사가 되었다.


 나뭇잎이 마르기 시작하는 10월 중순이 지나서야 교정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다. 아이들이 어디에서 뛰고 땀을 흘리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소소하게 부는 흙먼지를 밟으며 운동장을 찬찬히 걸었다. 공이 담을 넘는 것을 막아주는 펜스가 이렇게나 컸는지 새삼 고개를 한껏 위로 꺾고 바라보았다. 3월의 막막함과 긴장감, 힘겹던 시간이 다 과거가 되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에 숨도 제대로 못 쉬었던 지난날들은 이제 달력을 보며 그날 하루를 곱씹어야 그때의 답답했던 마음과 함께 방울방울 떠오른다. 노량진에서 공부하던 '나'와 아이들이 우렁찬 움직임을 애써 통제하는 '나'는 거의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는 '격세지감'에 몸을 움츠렸다. 정문 계단을 밟고 아이들의 씩씩한 인사를 받으며 수험생으로서 자신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비난하던 과거의 나에게 안쓰러운 마음과 위로를 보낸다.




 고시원 단칸방에서 그야말로 '한 줌'인 티오(TO)에 좌절하면서도 손에 든 기출문제집과 전공서적을 끝까지 놓지 못했던, 처절하고도 간절하게 현재를 충실히 살게 해달라고 빌었던 날이 있었다. 단순 '그런 날이 있었다.'라고 하기에는 스물다섯, 스물여섯의 나에게 미안해진다. 매일 잠에 들기 전에 '내일 혹시 내가 나태하여 공부를 소홀히 하면 어떡하지?'라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베개를 다 적셨다. 자존감을 찢는 아픈 말을 스스로에게 마구 쏘아대며 우울한 감정을 다 소진한 후에야 지쳐 잠에 들면 꿈에서도 최악의 상황을 만나기 마련이다. '불합격', '1차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면 노량진에서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하루가 갈수록 낮아지는 자존감을 감추고 거짓으로라도 긍정적인 사고 회로를 만들기 위해 일기장에 매일 자신을 칭찬하는 문장 세 가지를 적는 것을 규칙으로 정하고 충실히 지켰다. 같은 일과가 반복되었으니 당연히 일기장에 적는 내용도 같았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 백지 스터디를 완벽하게 했다.', '수업을 듣고 복습을 모두 끝냈다.', '순공 시간을 14시간이나 채워서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등의 문장이 일 년의 수험생활 플래너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물론 단점도 함께 적었다. 공부량이 부족했거나 쉬는 시간이 너무 길었거나 책상에서 잡생각을 오래도록 한 날이면 매섭게 채찍질하고 힐난했다.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서다. 노량진에서 몇 십만 명의 고시생 중 하나로 살아가며 친구들, 가족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하고 웃었다. 하지만 일기장 앞에서는 솔직하게 그날의 감정을 담아냈다.


 교직에 회의감이 찾아올 때, 스스로에게 실망했을 때,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생활 지도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마다 수험 일기를 꺼내 노량진이라는 회색 공간에서 자신과 끊임없이 싸웠던 나를 만난다. 물론 임용 공부를 하며 교사가 된 자신을 많이도 상상했다. 말 잘 듣는 아이들, 완벽한 수업, 여유로운 퇴근 시간, 칭찬받는 나. 교사가 된 지금,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뼘 방 안에서 수많은 나를 만나고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덕에 교직 생활이 버겁게 느껴지더라도 도망치거나 포기하지 않는 마음의 힘을 얻었다.


 노량진 수험 생활은 누가 봐도 외향형이던 성격이 완벽한 내향형으로 바뀐 계기가 되었지만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현재 내 모습은 지나온 시간이 만든 발자취이자, 결과물이다.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날을 살아갈 스스로를 '역작'이라고 칭할 수 있도록 현실에 부딪히며 고군분투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수험 생활은 뼈가 시리게 외로웠지만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현재'가 주는 선물이며 괴롭고 싫은 감정이라도 온전히 느껴야 어제는 몰랐던 깨달음이 마음 한편에 꽃피고 앞으로 있을 힘겨움에 큰 보탬이 될 것을 믿는다.


 노량진 수험생으로 고생했던 시간 덕에 향후 30년간 교직에 몸담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일찍 고3을 맡을 줄은 몰랐지만 임용 후 4년 간 고3을 도맡아 대입 지도에 목숨 걸고 가열하게 달려오면서 '대학'을 위해 입시 공부에 몰입하는 반 아이들과 '교사'가 되기 위해 20대를 다 바쳤던 과거의 모습이 수없이 겹쳐 보이는 것을 느꼈다. 서늘한 아침 공기 속에서 책과 씨름하는 아이들을 보며 노량진에서 보낸 시간을 한 올 한 올 되새긴 끝에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헤쳐나갈 줄 아는 삶이 현명한 것이라는 가치관을 세우고 지금에 도달했다. 비록 자신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지만 마음이 쉽게 약해지는 성격 탓에 타인에게는 아픔에 쉽게 공감하며 '그럴 수도 있지.'라고 먼저 말해주는,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 되었다. 담임교사가 이러한 생각으로 아이들을 대한다면 교사와 학생 사이에 벽이 허물어진다. 아이들을 담임을 편하게 생각하고 언제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 스스로를 무너지지 않는 등대로 삼고 아이들이 신뢰할 수 있는 교사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며 사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자 한다. 물론 즐겁게 사는 것도 더해서.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인생 최고의 날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다.
- 코마스 비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