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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빛 Oct 22. 2021

스물 다섯, 스물 여섯의 나에게

임용 수험생 일기

  학부 시절 내내 지녔던 대학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졸업 후 완벽히 사라졌다. 마음 한 켠에 몇 년간 열어보지 않을 서랍에 구겨 넣고 존재조차 잊고 살았다. 당장 임용 합격이 급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교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모든 일과, 사고, 행동은 오로지 임용 시험 일정에 맞춰졌으며 스스로 생각과 말, 움직임에 제약을 걸었다.


 대학생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학점을 잘 따는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특정 대학, 학과에 소속되어있다는 안정감에 임용 시험에 대한 불안함이 크지는 않았다. 오히려 동기들과 똑같은 공부를 하고 비슷한 고민을 하며 그러한 생각을 서로 나눌 수 있다는 동질감이 좋았다.


 졸업 후 아무 타이틀도 없는 '백수'로 세상에 내던져지니 나를 소개할 제목이 없다는 압박감에 자꾸 달력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에게 시계는 임용 시험 디데이를 향해 매섭게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임용 공부를 시작하지 않으면 그 기차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대학 생활을 마음껏 즐기던 한량은 '임용 시험 합격'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선고받은 고시생이 되었다.


 임용 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강사, 기간제 또는 다른 일과 임용 공부를 병행하는 수험생과 오로지 임용 공부 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올인'하는 수험생으로. 전자는 비록 임용 공부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지는 몰라도 혹여 불합격을 받았을 때 연봉, 호봉, 경력 등 남는 것이 많다. 즉, 경력에 공백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사회적 활동 없이 그저 임용 공부에만 매달리게 되면 공부 시간은 확보할 수 있지만 만약 불합격했을 경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 것과 다름없게 된다. 적어도 남들 눈에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으로서 활발히 생산활동을 시작할 나이인 꽃다운 스물 다섯에 스스로를 '임용 고시생'이라는 감옥에 가두는 것을 택했다. 


 친구들의 약속과 연락을 꺼리고, 휴대폰을 안방 서랍에 넣어 잠그고 오로지 집 근처 독서실에만 박혀 '올인'하는 수험생이 되었다. 비록 대학생 때 전공 공부를 코피가 터지게 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 목표가 분명하다 보니 금방 수험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올인 첫 해에는 공부가 재미있었다. 학점을 따기 위한 전공 공부가 아닌 서술형, 논술형 문제가 원하는 문장을 써내고 적절한 어휘, 어구를 기입하기 위한 공부에 초점을 두니 학부 때 전공시험 자료로 활용했던 문서들이 새롭게 받아들여졌다. 백색소음기가 설치된 쾌적한 독서실에 6시에서 7시 사이에 착석하고 12시에 귀가하는 날이 지겹도록 반복되었다.부스터를 단 것처럼 공부에 열의를 다하고 집에 와 베개에 머리를 뉘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간이 그렇게 뿌듯하고 상쾌할 수가 없었다.(집중력 높이기에 최고라는 산속 고시원에도 들어갔었다. 그러나 너무 답답하여 두 달만에 탈출했다.)  


 공부도 체력싸움이므로 매일 그렇게 고시 공부에 온 마음을 불태울 수 없었다. 멍때리는 시간이 많았거나, 계획이 어그러지거나, 예상 밖 만남이나 대화가 있었던 날이면 스스로에게 비수를 꽂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요즘도 가끔 그 시기의 수험생 일기를 읽으며 그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구경한다.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자신의 청춘에 대한 사과와 함께 스스로의 처지, 미래에 대한 협박이 살벌하게 적혀있다. 당근보다는 채찍질이 어마어마한 전공 공부량을 끌고 가는 원동력이라 여겨 스스로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대했다.


 하지만 낙방했다. 초수는 '관광고시' 문제만 구경하고 오는  의의를  것이므로 타격이 없었지만  년을  꾸려 최선을 다해 응시한  번째 임용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는 것은 타격이  컸다. 이틀을 꼬박 울었다. '1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문장을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밖에 나오지 않았다.   모금 마시지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불합격하는 꿈을 꾸고 울면서 깼지만 현실도 똑같았으므로 하염없이 눈물만 리며 낙담의 구렁텅이 속에서 허우적댔다.


 퇴근한 엄마는 웅크린 내 등을 이불 위로 쓰다듬으며 이제 이런 공부는 그만하라고 했다. 인생에 길은 여러 갈래이니 꼭 교사가 아니어도 어디든 직장만 잡으면, 거기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하셨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을 비관하는 온갖 말과 글을 다 찾아 읽고 공감하며 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희망이라는 것이 얄팍히 깔려 있어 한번 더 일 년을 투자할 용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부모님께 빌고 빌며 재도전을 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름 과외를 하여 공부 자금을 일부 마련한 끝에 임용 삼수생으로 노량진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미 두 달정도 본가에서 노량진까지 왕복 7시간 거리를 매주 주말마다 통학한 덕에 노량진 지리는 익숙했다. 임용 수험생활은 훨씬 이전에 시작했으나 늦은 봄인 5월에 진정한 노량진 고시생이 되었다. 고시원 첫날, 독서실 내 책상에 있던 지우개 가루, 이전 주인이 미처 떼지 못한 포스트잇과 어둡고 습한 분위기에 저절로 싸한 긴장감이 들었다. 택배로 부친 짐을 모두 정리한 후 임용 삼수 생활을 함께 할 플래너를 괜히 쓰다듬어보며 한 해 고생할 나를 몇 마디 문장으로 어루만졌다. '후회없는 시간을 살자. 결국엔 잘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자.'라고.


 계절이 바뀌고 유행하는 노래나 프로그램이 매달, 매주 바뀌는 것은 별세계 이야기였다. 그저 임용 강사 선생님들의 한마디 조언을 세상과 통하는 창으로 여기고 온 정신을 오로지 공부와 임용 합격에만 두고 살았다.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았지만 양 어깨와 다리에 돌덩이 같은 죄책감을 달고 스스로를 엄혹하게 대했다.


 임용시험이 두 달 남짓한 추석 연휴 전날, 본가로 내려가는 버스표를 탑승 한 시간 전에 취소하고 텅 빈 독서실을 묵묵히 지켰다. 우직하게 하던 공부를 계속하며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져가는 바람이 여러 겹의 옷 사이로 스칠 때마다 얕은 두려움도 같이 느껴졌다.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억누르며 팔목과 오른손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공부한 것을 백지에 써내리고 나면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울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불합격하면 그 이후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거지?'


 이내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달랜다.


 '아니야. 다 잘 될거니까 더 이상 아픈 생각은 안해도 돼. 잘 될거야.'


 자신과의 무수한 대화를 나누고 하루하루 버텨낸 끝에 세 번째 수험생활이 끝났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밤새워 기도한 자신이 우스웠다. 간결한 문장은 무참하고도 잔인했다. 즉,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공부한 끝에 '불합격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하나 없지만 일단 나는 '떨어지는 결과'를 향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 온 것이다. 내가 잘못하여 합격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충실하고 열심이었는지는 적어도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1차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그 문구는 지독하게 괴롭고 외로웠던 수험생활 전부를 증명해주는 문장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비합리적 신념이다. 하지만 불합격을 맞이한 그 순간만큼은 '나는 이 정도구나. 내가 주제넘게 교사라는 벽을 넘어보려 했구나. 나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때부터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갉아먹으며 나락으로 빠뜨리는 말을 자꾸만 되뇌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박스를 구해 고시원 짐을 모두 정리한 후 텅 빈 마음으로 본가로 향했다. 노량진 생활 후, 아니 2년 동안의 수험생활 후 내가 손에 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실패'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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