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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잇다 Jun 13. 2024

검은콩 언니 탐구일지

사람에게 반하는 순간




솔 언니를 처음 알게 된 건 신규 연수 때였다. 둥글게 모여 앉아 n년 뒤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똑부러지는 말투와 아나운서 같은 톤으로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고, 머무르지 않고 늘 발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한 게 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쩌다 점심 식사를 하게 됐을 때,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때도 느꼈던 언니의 분위기는 '빈틈이 없다'였다. 기가 무지 쎄보였고, 할 말은 다 하는 성격 같았고, 무엇보다 엄청 차가워 보였다. 얼렁뚱땅 살아가는 나와는 왠지 결이 달라 안 맞을 것 같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나(우당탕탕 돌멩이 초딩)를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다는 지레짐작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또 언니는 하얀 얼굴에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가 특징인데, 머리카락이 어찌나 윤기가 흐르고 직선으로 쭉 뻗어있는지 언니를 떠올리면 그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먼저 생각날 정도다. 어릴 적 검은콩 꽤나 먹었을 것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예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내가 생각하는 언니의 트레이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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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한층 더 가까워진 계기는 타 지역에서 한 달여의 기간을 함께 보낸 것이었다. 나란히 앉은 나 언니와 함께 앞자리, 뒷자리에 앉아 지루한 연수를 들으며 약간의 동지애를 키워나갔다. 의자는 딱딱하고 에어컨은 춥고 한여름이라 바깥공기는 무덥고 교수님 말씀은 당최 끝나지가 않고.. 그중에서도 말하기 좋아하는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정해진 쉬는 시간을 지키지 않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고요,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교수의 입술 끝만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시간은 째깍째깍 흐르고 밥시간도 가까워지는데 강의는 마무리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 사람이 도도하고 세련되게 손을 들며 말했다. "교수님~ 아까 일찍 끝내주신다고 하셨는데 지금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아요~^^" 다름 아닌 검은콩 언니였다. 거기 앉아있던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터라 조금씩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은 교수에게도 번졌다. 교수는 약간 민망해하면서도 자기가 강의 초반 호언장담했던 말이 있어서인지 "아 예,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허허허 10분 쉬고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검은콩 언니의 뒤로 아른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흐르는 물 얘기를 들었을 때 보다도, 바로 그날이 내가 언니에게 처음 반한 순간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당당함이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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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하던 연수 마지막날, 한 달간의 일정을 마무리하며 우등수강생을 뽑는 때였다. 가끔 졸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집중해서 들었고, 또 어릴 때부터 스스로 똑똑하다 자신했기 때문에 은근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효율 좋은 결과는 내 몫이었다. 설마, 나 뽑히는 거 아냐?라며 헛물을 켜는데, 총장님의 발표가 이어졌고 우등수강생은 의외 아닌 의외의 인물이었다. 바로 뒷자리의 검은콩 언니였다. 대-박. 똑똑한 건 알았지만 100명 중에 1등을 할 정도라고?! 하긴 언니가 공부하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갑자기 언니의 성실했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며 검은콩 언니가 더 멋져 보였다. 잠시라도 김칫국을 드링킹 했던 것에 살짝 머쓱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방정맞지만 이런 생각을 했다. '와..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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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찐, 빛, 해 이 네 사람이 다시 모인 건 다음 해가 되어서였다. 연수를 듣는 기간에는 몇 번이나 맛집과 유명하다는 카페를 돌아다녔는데, 거리가 멀어지니 아무래도 각자 살아가기 바빴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두 멤버가 다른 멤버들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며 우리는 뭉쳤고, 그 뒤로 매달 만남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며칠 전 만남에서는 내가 주소를 헷갈려 언니들이 원래 목적지로 가던 길을 멈추고 민족 대이동을 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심지어 언니는 차도 없는 터라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연락을 받고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언니들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솔 언니는, 내 미안함 가득한 얼굴을 보자마자 "에이 그럴 수도 있지~ 헷갈릴 수 있어 괜차나 괜차나~"라며 "잇다가 한번 실수했으니까 이제 나머지 세명한테 까방권 주자 ㅎㅎ 무슨 잘못을 해도 한 번씩 봐주는 카드 ㅋㅋㅋㅋ"라는 말을 덧붙였다. 와 뭐지.. 한여름의 강의실이 간만에 떠오르며, 다시금 언니의 등 너머로 후광이 비쳤다. 실수를 실수로 여겨주는 언니에게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또 2차로 간 카페에서, 이동하느라 고생한 언니들을 위해 내가 결제를 하고 자리에 앉은 참이었다. 계산하는 동안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던 다른 언니가 오자 솔 언니가 말했다. "ㅇㅇ아, 잇다가 진짜 카페 계산했어, 이 디저트까지~~! 안 사도 된다니깐~~" 언니 진짜.. 사회생활 만렙이다. 배려의 고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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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선 여름에 워터파크를 갈 계획을 짜는데, 잠깐 숙소 동태만 살핀다더니 갑자기 초집중해서 숙소를 찾는 솔 언니였다. 그렇게 순식간에 숙소를 정하고, 결제창을 보면서는 "내가 집 가서 더 할인해서 찾는 법 좀 알아볼게~"라고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그냥 바로 결제할 줄 알았음), 바로 다음날 아주 저렴한 가격에 예약까지 완료해서 단톡에 알린 언니였다. 뭐랄까... 언니는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언니도 부족함이란 걸 겪어본 적이 있을까? 게다가 언니는 내가 사람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인 솔직함까지 탑재하고 있고, 썰을 풀거나 티키타카를 할 때 재밌기까지 하다. 아, 솔 언니 진짜 멋있어. 가까이서 많이 배워야지!!! 파워 J, 배려심, 포용력, 공감, 사회기술, 꼼꼼함, 추진력, 똑똑함, 유머러스함, 어른을 대하는 자세, 당당함, 조리 있음, 언행, 자기관리, 요리실력(?), 다정함 등등 언니는 배울 점이 진짜진짜 많다. 언니, 내 친구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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