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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잇다 Jun 20. 2024

어둠이 있어야 알 수 있는 것들

멀어질 용기



소설 <네임스티커>를 읽고 산뜻한 마음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는 최근 전례 없이 가장 산뜻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만의 헤어짐인가. 이렇게 행복할 줄 알았으면 진작 거리두기 할걸.. 하는 후회가 잠깐 있었다. 하지만 오빠가 말한 "암(어둠)이 있어야 명(밝음)이 소중한 걸 알 수 있어"라는 사실을 깨닫기에 충분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지, 역시 사람은 좋은 것만 가득하면 좋은 게 좋은 건 줄 몰라.

솔직히 처음엔 그간 들였던 시간도 에너지도 돈도 모든 게 아까웠다. 진심으로 대했던 만큼 쏟아부은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 비용이 상당했다. 아마 우리 사이는 정말 오-래 갈 거야라고 착각한 탓이다. 아아- 이 모든 것들을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에게 쏟아부었다니. 나도 참 순진하구나. 한편으론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구나 싶어 속상했다. 그러다 시간의 흐름에 감정을 맡기고 몇 주가 지나 찬찬히 돌이켜보니, 생각보다 배운 것들이 많았다. 우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솔직함과 진심이 관계 맺음에 있어서 1순위인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리고 친구의 진정한 의미랄지 인간관계의 득과 실이랄지 여러 가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진짜 의리란 무엇일까. 나이와 성별, 현재 자기 상황을 불문하고 상대가 잘 되길 바라는, 진심 어린 마음과 애정 어린 기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더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또 덕분에 사람과 멀어지는 데에 어떤 기준이 생겼다. 어떤 사람은 잘만 손절하던데 나는 한번 마음을 주고 나면 관계를 끊기 힘들어했다. 이성 관계는 그게 쉬운데, 친구 관계에서는 왠지 어려웠다. 한날은 그게 하도 답답해서,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 그런데 그 사람이 나한테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이런 걸로 멀어져야 하나?"


오빠가 답했다.

"잇다야, 사람 사이가 꼭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러야만 멀어지는 건 아니야. 누군가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에너지를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멀어질 이유는 충분한 거야."


"아....! 그렇구나! 천인공노할 짓이 아니어도 멀어져도 되는구나?"


"그럼~ 아니면 시간별로 쪼개서 생각해 보는 건 어때? 그 사람과 만나기 전, 만났을 때, 만나고 나서 기분이 어떤지 나눠서 생각해 보는 거야. 만나기 전에 잇다 마음은 어때?"


"언젠가부터 좀 부담됐어. 그래서 만나기 싫어졌어."


"만날 때는?"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니까 할 말도 없고. 뭣보다 자꾸 쎄해. 눈빛이 탁하고. 또.. 나를 나 자체로 봐주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틀 안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프레임화 시키는 거 있잖아. 그리고 최근엔 뭔가 대결 구도로 끌고 가는 느낌을 받아서 불편했어. 견주려는 느낌. 아, 나를 깎아내리기도 했어! 그 사람은 자기객관화가 안되나 봐. 근데 그래서 유치하지만 뿌듯한 마음도 잠깐 들었어. 그래도 같이 있는 시간 내내 괴로웠어. 뭔가 나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것 같아."


"만나고 나선 어때?"


“엄청 피곤해. 감정 쓰레기통 노릇 하느라 힘들기도 하고. 생각도 많아져. 뭐지? 나를 이렇게 나쁘게 생각한다고? 싶은 때가 많아. 나를 안 좋게 생각하면서 나랑 왜 친하게 지내지? 싶어서 이해가 잘 안돼. 그리고 나라면 안 그럴 텐데, 싶은 순간이 많은 거 있잖아. 무례하다고 해야 하나,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또 음침하고 무서워. 왜 무서운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서워. 나를 해칠 것 같아. 내가 불행하길 바라는 느낌이야. 나한테 하는 거랑 다른 사람한테 하는 거랑 다르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렇게 소름일 수가 없었어. 아무래도.. 산뜻하지 않아.”

오빠에게 내 감정을 말하다, 문득 깨달았다. ‘아, 멀어질 이유가 충분하구나? 뭘 그리 고민한 거지?’ 이번 경험을 통해 누군갈 만날 때 전, 중, 후의 기분과 느낌으로 내가 어떤 상태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미움받을 용기가 아닌 멀어질 용기. 정과 추억을 나누었던 사람과 멀어지는 것. 이렇게 보니 외려 30대가 되기 전에 꼭 해보면 좋을 경험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은 듯도 하다. 이제야, 한결 산뜻해진 마음이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를 지키고 소중히 여긴다는 게 정말 별거 아니었구나. 내게 해 끼치는 사람을 잘라내어 (지난 글에서도 썼지만) 나만의 정원을 잘 가꾸면 되는 거구나. 어떤 사람과 ‘우리’로서 범박하게 묶일지는 내가 선택하는 거구나. 성인이기에, 내 주변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는 오롯이 내 몫이다. 그렇다면 주위 사람들과 어떤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면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차근히 풀어나가야겠다. 내가 가진 선명한 빛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배움을 준 그에게 고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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