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권리
요즘 사적 제재에 대한 말이 많다. 어떤 개인들이 유튜브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법의 테두리 밖에서 범죄자에게 벌을 내리고 있다. 이 같은 사적 제재의 바람에 우려를 표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국민의 심판이냐, 불법적 징벌이자 집단 린치에 불과하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것이다. 옛날 같았으면 아무 생각 없이 '옳소! 법이 단죄를 내리지 못하면 사회가 나서서 처벌해야 한다!'라며 적극적으로 지지했겠지만,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고서 그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적 제재를 통해 진짜 우리가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인지 면밀히 따져본다.
사진을 내걸음으로써 국민들의 지탄을 받도록 한다? 피해자의 억울함이 풀릴지 가늠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피해자뿐이다. 대중은 결단코 피해자의 처지와 입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해자의 얼굴이 팔리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다고 한들 피해자의 상처가 지워지는가에 대한 답은 미지수다.
얼굴을 기억해 뒀다가 범죄를 예방한다? 솔직히 불가능하다. 그 많은 범죄자를 어떻게 일일이 기억할 것이며 형을 채우고 나오는 기간까지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저자는 사적 제재를 통해 발생할 수 있는 제2의 피해자에 대해 논하기도 한다. 한때 등장했던 디지털교도소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는데, 여기엔 선량한 시민의 개인정보까지 잘못 올라가 있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고 한다. 정확한 확인 절차 없이 개인의 신상이 탑재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를 낳았다. 이 와중에 싸이트의 운영자는 n번방의 운영자이자 마약사범이었다고 한다.
나 또한 대부분의 국민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심 이러한 영상이나 글들이 더 양산되고 범죄자들이 얼굴을 들지 못하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영상들이 점차 인기를 타고 유튜브에 크게 확산되는 것을 보며, 어떤 두려움이랄지 걱정이랄지 불편하고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 피해자의 입장은 어떠한지 하도 의견이 많아 정확한 건 잘 모르겠지만, 다른 사건들만 생각해 봐도 피해자나 유족의 입장을 고려한 신상 공개인지 자문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이 답답해져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는 요즘 '나락보관소'같은 채널에서 범죄자 신상 털리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는 속이 시원한 것 같으면서도 왠지 마음 한켠이 불편해.”
"범죄자들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워지고 우리 사회로부터 쫓겨난다는 것에 대해선 속이 시원하지만, 일견 이게 정말로 피해자들을 생각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 중엔 '망각'을 하기 때문도 있잖아. 그런데 피해자들이 계속해서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게 되고, 잊고 싶은 일을 우연히라도 유튜브나 뉴스에서 보게 되고, 오래된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오는 심리적 부담감이 클 것 같아. 예를 들면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직장을 잘 다니고 있던 피해자가,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는데 동료들이 그에 대한 얘기를 막 꺼내는 거야. 그랬을 때 그 피해자의 심정을 생각하면, 정말 괴로울 것 같다는 거지. '내가 그 피해자인 걸 알게 되면 어떡하지? 나인 게 밝혀지면 어떡해?'라거나, '이 사람들은 오히려 피해자 탓을 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나는 그 부분이 걱정돼."
"아, 그러네. 피해자가 느낄 심리적 부담감은 생각 못했다. '잊을 권리(동시에 잊힐 권리)‘라는 거지? 정말 그렇겠다.. 어쩌면 가해자를 벌하고 싶어 하는 마음보다, 사건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클 수도 있어.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다. 언제나 피해자의 입장이 최우선 되어야 할 것 같아."
피해자의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허나 내가 범죄 심리 전문가도 아니고 피해자 심리 지원단이나 성폭력 상담소 센터장도 아닌 일반인인지라, 피해자를 위해 사회가 해줄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다만, 일개 시민일 뿐이라도 어떻게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심리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지, 재발 방지를 위해 어떤 대책을 마련하면 좋을지는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다. 저출생으로 온 나라가 난리라는데, 일단 살아있는 사람부터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 꼭 국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무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