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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잇다 Jul 11. 2024

너라는 위로

예미니의 일기




이래저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오빠가 차려준 저녁을 먹곤, 오늘은 휴식이 필요한 날이라며 안방에 앉아 혼자 축 처져 있었다. 따라 들어온 오빠가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겠다며 오감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우선 청각을 위해 빗소리 플리를 틀고 후각을 위해서 아로마인지 뭔지를 잠옷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또 촉각을 위해 다리를 주물러주고 덥지 않게 에어컨을 틀어줬다. 시각을 위해서는 최근 정주행을 시작한 돌싱글즈를 틀어줬다. 그리곤 이번 달은 집안일도 아무것도 돕지 않아도 된다며 자신이 다 책임지고 하겠다고 말했다(그 즉시 "어 알겠어!" 답함).



오빠가 뭔가 하나를 할 때마다 입꼬리가 씰룩이며 기분이 좋아지려 해서 일부러 입술을 댓발 내밀고 더 퉁퉁거렸더니 오빠는 오히려 내 팔을 쓰다듬어줬다. 침울해 있는 나를 위해 노력해 주는 오빠가 고마웠다. 오빠는 방문을 나가면서까지 내 상태를 유심히 살피곤 밀린 집안일을 했다. 빨래, 설거지, 바닥 청소 등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나는 돌싱글즈에 푹 빠져 앉아있었다. 저녁 내내 치유의 시간을 보내고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 나한테 이렇게 따듯하게 대해줘서 고마워. 오빠 덕분에 힘이 많이 난 것 같아. 그리고 집안일도 내일부터 나도 열심히 할게." 고마워하는 나를 더 고마워하는 오빠였다.


그리고 분명 행복한 마음을 안고 잠들었더랬다.





다음날 아침, 아침부터 예미니 자아가 다시 올라왔다. 뭔가 그냥 다 짜증이 났다. 곧 대자연의 날인가, 왜 이러지? 출근길에 오빠에게 전화를 해 괜한 시비를 걸었다. 어떤 일을 두고 오빠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 심통이 난 것이다. 약간 성질을 내고 직장에 도착한 뒤 오빠에게 카톡을 남겼다.

나 요즘 우리 관계에 너무 지쳐

자꾸 쉽게 짜증 내고 말도 잘 안 통하고 너무 힘들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 어이가 없다. 그냥 나 혼자 체력이 떨어진 듯. 그리고 최근에 오빠가 짜증을 낸 건 내가 먼저 짜증을 부린 탓에 답짜증(?)을 낸 일 밖에 없었다. 말이 안 통한다고 한건 지난 주말에 싸운 것 때문이었고 결국엔 서로를 이해하며 대화를 마무리해 이미 끝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때도 내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지금에야 이 글을 쓰면서 반성하는 바이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내가 정당한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빠를 질책하는 문장 몇 개를 더 던져놓곤 핸드폰을 잠그며 마음속으로 흥! 뭐라고 답하나 보자! 를 외쳤다.

오빠로부터 긴 답장이 왔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나를 한동안 소중하게 대하지 못했고, 오빠 자신의 상태를 더 잘 돌아보고 내게 다정하게 대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오빠의 장문에 알겠어라며 단 세 글자로 답했다. 화가 덜 풀렸다기보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지금의 상태(오빠가 미안해하고 내게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욕심이었다. 그렇게 퇴근 시간이 됐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나니 오빠 생각이 났다. 오빠에게 마구 횡포를 부린 것 같아 급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빠도 (나 때문지 일 때문인지) 조금 지친 하루였는지 퇴근길에 닭발을 포장해 오자고 했다. 그마저도 내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입안을 감싸는 매콤한 맛에 한입 먹자마자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빠가 개구진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화해한 거죠!!!




오빠에게 물었다. 아까 내가 그런 카톡 보내서 기분이 어땠어? 안 좋았지,라고 답하는 오빠의 얼굴에 잠깐 그늘이 졌다. 오빠는 잘못한 게 없었는데 내 인성 이슈(?)로 다툰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배불리 먹었더니 이번엔 오빠가 수박을 가져왔다. 어제 나랑 싸우고서도 수박을 샀구나. 내가 이렇게 부족한 사람인데도, 오빠는 나를 사랑해 주는구나. 쓸데없이 투정 부렸다..



생각이 근 2~3일간의 내 행동에 대한 반성에까지 미치자, 밥도 다 먹었겠다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베란다로 향했다. 어제는 오빠가 했던 집안일을 오늘은 내가 하기 시작한 것이다. 빨래를 개고 바닥을 청소하며 그래, 오빠도 많이 힘들 시기인데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휴. 좋은 사람, 현명하고 지혜로운 아내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구나. 내가 오빠에게 그런 남편이길 바라는 만큼 나도 그런 사람이 되려 더 노력해야지. 오빠 내가 힘들게 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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