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듣는 노래
어린 시절 김수철은 그저 장난스럽게 느껴졌습니다. 80~90년대 가요 프로그램에서 그는 ‘정신 차려’나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같은 노래를 귀여운 율동과 함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불러대며 시청자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런 그가 매우 뛰어난 로커이자 국악을 연구하며 ‘기타산조’라는 장르를 창조한 기념비적인 음악인이라는 사실은 어른이 돼서야 알게 됐습니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해 발표했던 앨범에서 보여준 기타산조는 제게 큰 영감을 줬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음악을 마음껏 만들면서, 돈이 필요할 때는 대중적인 노래를 만들어 히트시킬 줄도 알던 천재였던 셈이죠.
산처럼 엎드린 너의 절망을 잠재우고 창 너머로 조용히 동이 트는데/아직 가시지 않은 통증에 우리는 슬픔 때문에 돌보지 않은 세월이 너의 가여운 얼굴을 스쳐가듯 바라본다/상처로 길들여진 마음 위로 흐르는 시간은 그대 모르게 지친 어깨를 두드린다
이 곡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김수철의 노래는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노랫말을 뽑아보라 하면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겁니다. 10집에 수록된 재즈풍의 이 노래 ‘지친 어깨’를 듣고 있으면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새벽을 맞는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앨범 제목은 ‘Men in blue’이지만 꼭 남자에 국한된 노랫말은 아닙니다. 화자의 절망은 “산처럼” 엎드려 있습니다. “아직 가시지 않은 통증”이 그의 몸 안에 새겨져 있죠. 상처에 길든 그를 달래고 위로해주는 것은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뿐입니다.
간단하지만 깊고 어두운 마음을 내포하고 있는 노랫말이라 느꼈어요. 검정색 고물 FM 라디오를 통해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건 중학생 무렵입니다. 주변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등교하는 게 지옥 같았던 때입니다. 매일의 삶이 너무 무거워 내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친 어깨’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당시 제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원곡의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자의적인 해석일 겁니다. 그래도 당시 제게 이 노래의 의미는 특별했습니다. “지친 어깨를 두드린다”는 마지막 노랫말도 좋았지만 그래도 가장 마음에 남았던 것은 “너의 가여운 얼굴을 스쳐가듯 바라본다”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절 제대로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은 괴롭히거나 외면했고, 선생님은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고, 뒤늦게 이 사태를 알게 된 부모님은 가해자를 색출하는 데만 정신을 쏟았습니다. 제 마음은 뿌리째 뽑혀 나뒹구는 화초 같았습니다. 저 자신을 다시 화분에 담는 일은 까마득해 보였어요. 그때 마음을 두드린 게 바로 이 노래입니다. 방향을 잃고 나뒹구는 절 바로 세워놓고 “너의 가여운 얼굴을 스쳐가듯 바라본다”고 말해주었으니까요. 전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네 가여운 얼굴을 보고 있다는 말을요.
마음이 지옥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대단한 기적이나 마법이 아닙니다. 그저 그 마음을 제대로, 똑바로 봐주는 겁니다. 사실 그거면 충분한 거였죠. 상처받는 데 익숙했던 한 소년의 지친 어깨를 두드려주던 이 노래를 기억합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그때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스스로가 조금은 대견하게 느껴집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 소년은 고난의 시간을 관통해 ‘지금의 제가’ 됐으니까요. 그때 그 소년에게 수고했다고, 이제는 그만 아파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