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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Oct 15. 2023

내가 아직 당신을 경계하지 않았던 때

매일 쓰는 편지

아이들은 참 잘 웃는 것 같아.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전동차에서 처음 본 아가들을 보고 방긋 웃으며 손 인사를 하면 아이도 금세 따라 웃던걸.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생각해보면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사람들과 친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진 않아. 그 속도는 나이를 먹을수록 느려졌어. 상대방에 닿기까지의 속도가 초등학교 때 시속 100킬로미터였다면, 중·고등학교 때는 80, 대학 때는 60, 30대에는 40, 요즘은 10~20킬로미터쯤 되는 것 같아.

 

이상해. 예전에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경계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게 답인 것 같거든. 사람을 만난다는 것,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

 

초등학교 때였나. 어릴 적 나는 아파트 한 채 없던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구시가지에 살았어. 그 동네 분위기가 어땠냐면 말이야. 대략 이래. 집 앞을 나서서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가기까지 약 5분여의 시간 동안 최소 서너 명의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해야 했지. 나와 여동생에게 공짜 떡을 쥐여주고는 했던 방앗간 아저씨와 동전 하나까지 깐깐하게 챙겼던 구멍가게 아줌마, 내가 혹시 빨간 딱지 코너 쪽으로 갈까 봐 흔들리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비디오 가게 삼촌 등이 떠오르지. 어이 XX야, 동생은 잘 있어? 너 중간고사 때 몇 등 했어? 으이그, 공부 더해서 고생하는 부모님에게 효도해드려야지. 잔소리가 대부분이었으니 난 때마다 억지로 웃는 척하며 재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지. 하굣길에는 더하지. 뽑기 엿을 팔던 아주머니와 은행원 누나도 거리를 지나다가 마주치면 반갑게 눈웃음을 치며 아는 체했어. 누군가는 아마 내게 사탕 몇 개를 쥐여주기도 했을 테지.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아는 사람을 자주 만났던 것 같아. 한 살 많은 영화클럽 선배를 우연히 만나는 날은 제일 신나는 날이었지. 우린 영퀴(영화퀴즈)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영화 지식을 뽐내느라 바빴어. 내가 톰 크루즈와 폴 뉴먼이 나오는 당구 영화 <컬러 오브 머니>를 모른다고 하자 “어?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너 씨네필 맞아? 오늘 집에 가서 당장 빌려 봐!”라고 말하던, 마치 그 영화를 보지 않으면 넌 이제 어디서 영화 좀 봤다는 말을 하지도 말라는 식의 눈빛을 보내던 그 선배를 잊을 수가 없어.

 

코로나19 이후, 그리고 각종 사건 사고가 터지면서 많은 게 변한 것 같아. 이제 사람들은 서로를 최대한 쳐다보지도, 아는 척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을 가슴에 새기고 있어. 외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떨 때는 경계하는 시선도 느껴져. 불쾌하고 아쉬울 때가 많지만 어쩔 수 없어. 당신과 나는 모르는 사이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니까. 그러니까 이제 알아간다거나,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 같은 건 거의 사라져버렸어. 가까운 동네 사람과 인사를 나누지 않는 건 물론이고 당장 옆집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겠어.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처음 보는 내게 마냥 웃어주던 아가들을 보니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나 봐. 그래도 믿을 건 역시 아가들뿐이야. 하지만 이 녀석들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나를 경계하겠지. 아마 우린 앞으로도 영원히 서로를 알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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