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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yeong Oct 13. 2023

한없이 무겁고 한없이 가벼운

매일 쓰는 편지 

너도 알다시피 금요일은 평상시보다 업무가 일찍 끝날 수(?) 있는 날이야. 바빴던 일들을 처리하고 비교적 여유로운 날들을 보내는지라 오늘은 일찍 퇴근해 군자역 근처 카페 ‘연필’에 다시 들렀어. 거기에 ‘보늬밤 페어링’이란 메뉴가 있는데 그게 참 기가 막혀. 큰 밤 두 알을 매력적인 소스로 낸 디저트와 필터 커피를 함께 내주지. 오늘은 콜롬비아 비아라조 트로피컬 원두를 필터로 내려 주더군. 가향 커피들은 인위적이지만 커피의 향이 강해서 좋아. 트로피컬 과일 향이 물씬 풍겨서 색다른 맛이 나더라고. 밤 요리와도 잘 어울렸고. 

 

쉬는 날이면 마냥 카페에만 있고 싶어. 요즘은 그래.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바리스타나 사장이 선곡한 노래를 들으며, 별 생각 없이 시간을 때우는 게 좋아. 걱정이나 불안 없이 보낼 수 있는 시간들이 정말 귀하다고 느껴. 불안은 어차피 사라지지 않으니 인정해라, 껴안고 살라고 누군가 충고하더라. 그래 말은 쉽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되겠어? 어린 시절부터 달고 살아온 불안이 쉽게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참 이상해. 소심하고 생각이 많은 성격 탓일까? 그럴지도 몰라. 사춘기 시절부터 나는 고민을 스스로 만들 뿐 아니라 그 고민에 잠식당하는 스타일이었어. 작은 고민들은 불안이 되고 그 불안은 곧 내 모든 걸 점령해버리는 거야. 그러고 나면 나머지 모든 일은 가볍게 느껴져. 오직 그 고민만이 나의 숙제라고 생각하게 되지. 이를테면 학창 시절 나는 운동이나 체육시간을 싫어했어. 달리기도 못했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지도 못했지. 언제나 체육 선생님의 손쉬운 놀림감이었어. 그래서 운동회나 체육시간 전날이면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았지. ‘비가 와서 실내 수업을 하게 된다면 좋을 텐데!’, ‘오늘은 놀림을 덜 받아야 할 텐데!’ 그럴 때면 다른 공부나 교우 관계, 성적표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버려. 

 

어릴 때 성격은 어른이 돼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난 여전히 비슷한 일을 반복하고 있어. 중요한 발표나 작업 마무리 전날이면 숱한 고민과 불안에 휩싸이게 돼. 다른 일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지. 이런 불안을 극복하고 업무를 무사히 마무리하려면 극한의 스트레스를 감당해내야 해. 그래서 두통이 잦고 갑상선이 안 좋은 걸까. 이런 성격을 고치고 싶은데 잘 안 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잖아. 나도 잘 알고 있거든. 

 

그런데 평화나 안정을 찾는 건 의외로 별 것 아닌 데서 비롯돼. 이를테면 맛과 향이 풍부한 필터 커피를 한 잔 마셨을 때, 누군가에게 “요즘 넌 어떻게 지내니”라며 안부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다디단 하겐다즈 딸기 맛 아이스크림이나 견과류가 다량 함유된 프로틴 초코바를 해치웠을 때 갑자기 마음이 안정될 때가 있어. 참 이상하지. 내 고민과 연관성이 없는 것들에서 위로를 받으면 갑자기 내가 안고 있던 고민들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거든. 오늘도 그랬어. 요즘 나는 앞으로의 미래와 업무, 나이 등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거든. 그런데 좋아하는 카페에서 맛있는 필터커피를 두 잔(실은 한 잔을 더 주문해 마셨어) 마시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어. “괜찮아.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야. 나도, 너도, 우리도 다 마찬가지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 

 

무겁게 생각하면 한없이 무거워지고, 가볍게 생각하면 한없이 가벼워져. 그동안 나는 내 고민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남을 찾았어. 누군가의 위로와 응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꼭 그런 건 아니더라고. 커피 한 잔으로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거였어. 30분여 분 그 카페에 머무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이 시간이 흐르지 않고 영원히 멈춰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야. 사람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꾸기 마련이잖아. 꿈은 이루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아.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 안에 계속 머무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돼주는 걸.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던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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