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는 편지
오늘은 오전부터 오후 4시경까지 밖에서 근무했어. 찾아가서 이야기 듣고 원고로 담아내는 게 업무 중 하나이다 보니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추석 연휴와 늦은 여름휴가를 마친 후 첫 외근이라 기분이 남달랐어. 날이 좋아서 거리를 걷는 게 좋더라고.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지. 오전에는 클래식 토크 콘서트를 취재하고 오후에는 차기 매거진을 위한 기획회의에 참여했어.
취재를 위해 출근하던 길에 음악을 들었는데, 그중 90년대 전설적인 랩퍼 투팍(2pac)의 노래들도 있었어. 특히 ‘Hit 'Em Up’는 노랫말이 살벌해. 당시 치열했던 미국 힙합 씬의 전쟁(동․서부 힙합)을 상징하는 노래거든. 난리도 아니야. 죽일 거고, 없앨 거고 등등 정말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야. 거의 모든 문장마다 욕설이 들어가지. 한국 음악 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어. 살벌한 노랫말을 듣다 보면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게 되더라. 아, 걱정하지 마! 난 나쁜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냐. 다만 이런 과격한 음악이 내 마음을 두들긴다는 소리야. 마치 “가만있지만 말고 어서 뭐든 행동해보란 말이야! XX야!”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리거든.
뭘 행동하라는 걸까?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내내 그 생각에 몰두했어. 글을 더 전투적으로 써보라는 건지, 일기만 쓰지 말고 소설을 쓰라는 건지, 아니면 앞으로의 인생을 대비해보라는 건지…. 그 모든 게 해당할 수도 있고,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야. 생각해보니 난 소설을 쓰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됐어. 대학과 이런저런 아카데미에서 소설을 배우면서 글을 잘 쓴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소설을 잘 쓴다는 말은 못 들어봤어. 대학 때 소설 담당 교수는 내게 “넌 소설에 재능이 없다”고 말해버렸지. 그것도 졸업작품을 써야 하는 4학년 2학기 무렵에 들었던 말이야. 그 말은 이후 내 인생을 지배해버렸어. 그 말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어. 그때부터 소설을 쓴다는 걸 두려워했나 봐. 이런저런 소설을 잘 챙겨봤지만,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노트나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해두기도 했지만 실제로 소설에 옮긴 적은 없어.
난 재능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네게 재능이 있어”라거나 “넌 할 수 있어”라는 격려를 듣고 싶었겠지. 하지만 누구도 내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 내가 스스로 개척해서 만들어내야 했지만 그때는 그런 길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나 보지. 그렇다면 요즘에는 극복했느냐고? 완전히 극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어. 그냥 노력 중이라고만 해둘게. 소설뿐만 아니라 다른 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나는 내 자신에게 한없이 냉정해서 에세이를 써도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해. 매번 어쩔 수 없이, 다음에는 조금 더 나은 글을 쓰겠다고 소심하게 생각할 뿐이지.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도 난 자주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어. 내 기준에서 보면 그렇게 글을 잘 쓴 것 같지 않은데도 어떤 사람들은 아주 쉽게 출간 제의를 받더라고. 물론 알고 있어. 출판 관계자가 찾는 건 ‘완벽한 문장’, ‘견고한 글’이 아냐.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내용, 호기심이 느껴지는 기획,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팔릴 수 있는 글’을 찾는 거니까. 특별한 경험이나 이슈 없는 사람이 백날 정확한 문장을 써봤자 소용없어. 문장 작법이나 맞춤법을 몰라도 특별한 경험이 있다면 시선이 달라지지. 이를테면 대기업이나 명문대학 출신의 한 사람이 갑자기 좋은 조건을 박차고 자영업을 시작했다면? 혹은 해외여행을 다녔거나 특별한 체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런 사람은 대번에 출판 관계자의 눈길을 끌게 되지. 솔직히 글을 잘 쓰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글의 완성도는 에디터들이 높여줄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어차피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거든. 남의 글을 책으로 만드는 게 내 직업인데, 정작 내 글은 책으로 만들 수 없지. 발악해도 난 안 될 거야. 내겐 특별한 경험이 없어. 그렇다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기획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업무 시간을 피해 매일 조금씩 쪽글을 적을 뿐이야. 숙제처럼, 응당 해야 할 일과 중 하나처럼 생각하고 있어. 누구에게 주목받지 못해도 괜찮아. 어쨌든 나는 글자와 행간, 그리고 그들이 쌓아놓은 이 세계를 사랑하니까. 남들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도 좋고, 내가 직접 축조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 물론 아무도 찾지 않는 집이 될 확률이 높지만, 뭐 어때? 내가 정성스레 지은 집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니까 내가 마음껏 즐기면 되는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난 지금껏 하던 대로 계속 일하고 남는 시간에 내 글을 쌓아 올릴 거야. 에세이든, 소설이든 그 무엇이든. 그렇게 축조된 세계가 내 인생을 증명해주겠지. 그게 좋든 아니든 상관없어. 그러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럽다고 생각해. 내게 중요한 건 하룻밤의 성공이 아냐. 난 글자를 다루고 종이 뭉치를 만지는 게 정말 미치도록 좋은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난 이토록 좋아하는 이 일을 내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할 생각이야. 누가 지켜볼 필요는 없어. 어차피 이 길은 아주 좁아서 나 혼자만 다닐 수 있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