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점심시간 때 대화를 해야 할 때마다 곤혹스럽다. 대개 요즘 드라마나 주요 이슈를 이야기하는데 난 그런 데 별 관심이 없으니까. 어린 시절도 그랬다. 중고등학교 때도, 대학 때도 나는 당대 유행하는 것들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장 내 마음에 끌리는 게 내 트렌드이자 내 유행이었다. 유행을 무조건 거부한 게 아니다. 좋아하고 관심 있는 걸 좇다 보면 대개 사람들의 눈 밖에 나 있거나 유행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허다했다. 세상의 표준 취향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조금씩 어긋난다는 느낌은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주변부 인물, 아웃사이더임을 인지했다. 주변으로 밀려났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데 별 문제는 없었다. 직장을 다니기 전까지는 말이다.
직장에서는 취향이 중요했다. 책이나 콘텐츠를 다루려면 대개 최근 흐름과 경향을 읽고 있어야 했고, 그걸 책과 콘텐츠에 반영할 줄 알아야 했다. 내 취향은 쓸모가 없었다. 재즈 보컬 그룹 낯선사람들의 음악이나 오래된 블루스, 재즈, 흑백 무성영화나 공포영화 시리즈, 히치콕 감독과 키에슬로프스키 감독 영화를 사랑하는 내 취향은 회사 업무를 진행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됐다. 살아남으려면 취향을 바꾸거나, 내 취향을 유지하되 최신 유행을 추가로 주입하거나 선택해야 했다. 전자는 도저히 마음이 따르지 않아 후자를 택했다. 쉽게 말해 멀티 능력을 길러야 했다. 일할 땐 이걸 잘 이해하고, 놀 땐 저걸 잘 이해하고. 남들에게는 참 쉬운데, 내게는 그게 참 어려웠다. 메타버스나 메타휴먼이 어쩌고저쩌고, 요즘 유행 드라마의 출연진이 이렇고 저렇고. 먹고산다는 건 나를 깎고 다듬어 정해진 틀에 맞춰야 하는 일임을 실감했다.
철없는 건지도 모른다. 한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아직 미혼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지. 결혼해서 아기까지 있다면 이런 고민은 진즉에 사치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철이 없든, 몽상가라 불리든, 어떻든 간에 나는 내 취향이 싫지 않다. 빌 에반스나 냇킹콜의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철 지난 20~30년 전 드라마를 보며 거기서 어떤 ‘감각과 의미’를 발견해내고, 오래된 무성영화 속 배우들의 과장된 표정과 움직임을 보며 깔깔거리는 내가 난 퍽이나 만족스럽다. 난 이런 사람이고 그건 어쩔 수 없다.
내 취향은 내 방 안에서는 충분히 쓸모가 있다. 거기서 돋아나고 피어나는 이야기들은 내게 더없이 달콤하다. 그래서 내가 내 방을 제일 좋아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