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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Jul 21. 2021

단편소설 :
봄이 기다리겠죠 上

「효원」 130호


손끝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았다. 화들짝 놀랄 만큼 차가운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얼음보다는 따뜻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한번 만져보자. 검지손가락을 곧게 펴고 점차 앞으로 내뻗는다. 그리고는 툭.




‘딱딱하네’




그것과 닿은 집게손가락을 서로 문질러 보자, 조금의 물기가 느껴진다. 꽤나 축축한 상태인가? 두 손가락을 마찰하는 행위를 이어간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의 서랍장을 뒤진다. 내가 방금 촉각으로 파악한 정보들을 머릿속의 데이터에 대입해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이토록 차갑고 축축하며, 딱딱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명확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함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눈길을 내린다. 그 눈길의 종착점은 바로… 물잔. 아 그렇구나, 난 방금까지 식탁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그제야 주변 환경이 다시금 인지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나무 의자가 가진 촉감. 주변의 산에서 흘러나오는 산새의 울음. 살짝 열어놓은 창문의 틈새에서 길게 뻗어 나와 내 발끝을 간지럽히는 노을 햇살의 적적함까지. 내가 물을 마시고 있던 순간의 주변 환경이 이랬구나.




힘이 쭉 빠져, 의자의 등받이를 따라 몸을 늘어뜨린다. ‘나는 물을 마시고 있었다’는 간단한 사실. 어떻게 이걸 잊을 수가 있을까. 바로 몇 초전까지 마시고 있던 물체의 촉감에 당황하는 것. 그리고 다른 감각들에서 무뎌지는 것. 나는 이러한 상황이, 촉감에 극도로 집중하느라 일어난 긍정적인 결과가 아님을 알고 있다. 나는 ‘잊은 것’이다. 단순하게는, 내가 취하고 있던 행위에 대해서. 더 나아가서는 그 순간 자체에 휑한 구멍이 뚫리는 것. 그리고 그 구멍에는 어느새 완전히 생뚱맞은 것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는 한다. 내가 호기심에 물잔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물을 마셨던 순간은 어떻게 기억되었을까. 토마토를 씻었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이러한 현상이 이상한 것인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겪어 와서일까.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경험을 늘상 하고 있겠다고 생각했고, 나는 아쉽게도 그런 면에서는 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렇지 않은가. 어린 시절에는 무릇 튀어 보이고 싶어 하며, 자신이 특별한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바라는데. 이토록 특이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남들도 모두 그럴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말았다니. 내내 목줄을 차고 산책길에 나서던 강아지가 오히려 목줄 없이는 발을 떼지 못하고 주인의 눈치만 살피듯이, 어색하고 이질적이다.




내가 이런 경험을 언제부터 하게 됐더라. 떠올리려 노력해보니 어렵지 않게 떠오르는 몇 가지 기억들이 있다. 과거의 장면을 정확히 떠올리는 것은 꽤나 피로한 일이어서, 머리에 쥐가 난 듯 지릿하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찬물을 마신다. 그래 나는 지금 물을 마신다. 잊지 말아야지.




어릴 때의 나는 엄마와 잦은 말다툼을 했었다. 그것은 주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는데, 가령 내가 몇 시에 일어났는지를 두 사람이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언제 침대에서 나왔는지 까먹은 것이 아니다. 내 기억에는 분명히 7시 자명종을 직접 껐는데, 엄마는 내가 10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고 하니. 답답할 수밖에. 그때의 나는 단순히 엄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우리 집에 있었던 하나의 룰 때문이었는데. 나는 8시 전에 일어나면 컴퓨터 게임 1시간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받아쓰기 숙제를 해야만 했다. 나는 당연히, 내가 컴퓨터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엄마의 바램에서 나온 선의의 거짓말로 여겼다.




뭐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쓸데없는 말다툼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난 7시에 일어난 적이 없었을 테지. 단지 어디서 굴러들어온 다른 조각들을 붙잡고 사실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게 언제였을까’




내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그중에서도 명확한 계기가 있었는데… 아 그래, 면도크림. 면도크림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이제는 헛웃음이 나온다. 그 이유는 거울 장 밑의 작은 서랍 하나만 열어봐도 알 수 있다. 10개가 넘는, 각기 다른 브랜드의 크림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있을 테니.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면도크림을 쟁여놓는 사람이 또 있을까. 비닐도 채 뜯지 않은 새 제품들이 7개. 내가 최근 들어 망각과 착각을 거듭한 횟수이다. 어느 순간 면도크림이 다 떨어져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마트에 가서는 내가 항상 쓰는 제품(이라고 착각한 것)을 집어 집으로 돌아온다. 밑바닥을 보인다고 생각했던 쉐이빙 폼은 부족했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찬물을 한 컵 따라 마신다. 목을 따라 흘러내려 가는 물의 촉감이 차다.




나 자신의 기억이 조금은 이상하게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 이전에는 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유추하는 수준의 것이었다면, 이제는 그 사실이 몸으로 와 닿을 정도로 심해졌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될 때까지 진행된 이유도 어떻게 보면 망각 때문이겠지. 정신없이 자신의 꼬리를 좇는 새끼 강아지가 자신이 돌고 있는 이유를 까먹고도 그 행위를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나아가지 못한다.




여기까지 상황을 되돌아보니, 어떠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내가 순간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순간 자체를 명확히 기억할 수 없다면, 추후에라도 되새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일기 정도? 목소리를 녹음하는 것은 어떨까. 사진을 찍어서 남기는 것도… 그래 사진이 좋겠다. 일일이 글자를 써가며 기록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간단할 것이고, 순간을 녹음하겠다며 혼잣말을 주절거리는 것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리라.




중고 카메라가 좋겠지. 한번 마음을 정하니 나머지는 일사천리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까닭일 것이다. 집 근처에 위치한 점포를 하나 찾아놓는다. 그곳의 주소를 복사해 휴대폰의 메모장에 옮긴다. 그리고 적는다.




‘나는 내일 중고 카메라를 사기 위해 이곳에 간다’




해가 졌다. 아직 봄이 완벽하게 오지 않아서인지, 낮에게 할당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늘에 떠 있던 해가 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밝은 달이 떠오른다. 베개를 평소와는 반대인 창가로 옮긴다. 달이 움직일 궤적을 그려보며 괜히 말을 건다. 오늘은 깨지 않게 해주세요. 내가 중간에 깬 것인지, 잠을 청하려고 막 누운 것인지 헷갈려하지 않도록.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메모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과 같구나. 확인을 통한 확신이 생기자 나갈 준비를 한다. 카메라라고는 어릴 때 집에 굴러다니던 고물을 장난삼아 몇 번 만져본 것이 전부이니, 전적으로 카메라 가게 사장님께 맡기는 것이 좋겠지.




지도로 봤을 때, 점포는 집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걸어서 15분 정도. 10분 남짓 걸었을까, 과연, 저 멀리서 간판이 보인다.




[중고 카메라 취급합니다]





가게 앞에 도착하고, 꽤나 깔끔하게 닦인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딸랑-하는 종소리가 나를 반긴다. 그리고 뒤따라 들려오는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




“당기라니까… 적어놔도 참”


“ … ”




그제서야 유리문에 붙어있는 문구가 보인다. ‘당기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밀어댔는지, 바닥에는 문이 억지로 밀리면서 긁힌 자국이 짙게 남아있다. 제품을 사러 온 입장에서 괜히 밉보일 필요는 없기에, 얼른 사과를 드리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보질 못했네요”




조금 숙였던 고개를 들자, 카메라가 가득한 진열장 너머로 실루엣이 보인다. 주인분이실까? 곱게 다린 와이셔츠와 깔끔한 넥타이. 진열장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필시 공들여 광을 낸 구두를 신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들려오는 웅얼거리는 목소리. 아마도 잠시나마 성질을 드러낸 것에 대한 나름의 사과이리라.




밝은 조명에 눈이 적응하자, 주인분의 이목구비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자하면서도 강함. 쾌남형이다. 멋들어지게 넘겨 정리한 머리는 잿빛을 띤다.




잠깐,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나 깊게 관찰한 적이 있었던가? 흠.




너무 빤히 쳐다본 탓일까. 주인분(이 아닐 수도 있지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나의 상념을 깨려는 듯.




“그래서, 청년께서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가?”


“아 그게, 카메라를 좀 사려고 왔는데요, 중고로요”




“중고라… 중고 좋지. 요즘 사람들은 온통 새것만 찾으려고 드니”


“ … ”




그 후 이어진 생각해둔 기종이 있냐는 질문에는, 카메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점포 사장님을 믿자는 마음으로 오지 않았는가. 내 대답에 주인분(이제는 거의 확실하다)이 잠깐 고민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카메라라는 게 말일세-




“…어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지에 따라 정말 천차만별이거든”


“아 그런가요?”




사진의 장르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런 생각을 채 마무리하기도 전에 질문이 이어졌다.




“먼저,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 … ”




내가 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사실대로 말하자니 나의 치부를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냥 둘러대는 것이 좋을까? 그래 아무렴 그게 좋겠지, 그냥 갑자기 관심이 생겨서요-하며 입을 열려는 찰나, 주인분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세어버린 백발들 사이에서 더욱이 눈에 띄는 검은 머리는, 곧 이분이 꽤나 굳센 성정을 지니고 있음을 알리려는 듯, 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킬 것만 같다.




왜일까. 어떠한 포인트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분께는 사실을 말씀드려도 되지 않을까? 아니, 사실만을 말씀드려야 할 것만 같았다.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서요”


“ … ”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 분명할 텐데. 말을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연다. 그리고 내 의도와는 달리, 전부 말해버리고 말았다. 7시 자명종에 대한 이야기와 면도크림, 그리고 어제의 일까지. 아저씨와는 분명히 초면인데. 하지만 후회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뒤따르는 감정은 오히려 후련함. 목에 걸렸던 가시가 빠진 것처럼 시원하다. 어쩌면 내가 깨끗이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속에, 정말로 목에 가시가 박힌 적이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이야기가 끝나고, 아저씨는 얼마간 나를 바라보셨다.




“그럼… 필름 카메라는 어떤가, 자네에게 어울릴 것 같네만”




단순히 중고의 카메라를 구매하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을 찾아오긴 했지만. 그 예상 폭에 넣기에 필름이라는 존재는 너무도 생소한 것이기에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필름이요?”


“그래 필름. 좀 구닥다리 방식이긴 하지만 신뢰도는 높네, 자네는 그런 걸 찾는 게 아니던가?”




신뢰도가 높다는 말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탄탄하지 못한 마당에, 오래된 방식이 오히려 더 믿임직스럽게 다가왔다.




잠시 진열장을 뒤지던 아저씨의 손에, 벽돌처럼 생긴 은빛의 카메라가 딸려 나왔다. 나온 지 40년이 넘은 모델이라고 하는데, 이제까지 좋은 주인만을 거친 탓인지 겉이 깨끗하다. 만져보니 차갑고 묵직한 금속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에 쏙 들어왔다.




그 뒤는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카메라를 제대로 다뤄본 적이 없었던 나를 위한 사용법 설명을 듣고, 필름 두 롤을 고른 후, 그 자리에서 모든 대금이 치러졌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메모장에 꼼꼼히 기록했다.




이제 여기서 볼 일은 모두 마쳤다.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문을 나섰다. 이번에는 문에 적혀 있는 ‘미시오’ 문구를 지키려고 각별히 노력했음은 덤.




집에 도착해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자. 이제야 내가 오늘 카메라를 구매한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흐트러진 짐을 정리하고, 카메라를 꺼낸다. 역시나 묵직한 감촉이 손에 전해진다. 첫 필름을 넣어봐야지. 메모장을 연다.




몸체 상단에 있는 레버를 당기자, 틱-하고는 카메라의 뒤판이 열린다. 그 안의 공간이 셔터 룸. 필름을 끼우는 부위이자 셔터가 작동하는 곳이다. 필름을 꺼낸다. 그리고 셔터 룸의 좌측에 필름 통을 끼우고는, 튀어나온 필름 꼭다리를 잡아서 우측의 톱니에 홈을 맞춘다. 그 상태에서 장전 레버와 셔터를 두어 번 작동시킨 후 뒤판을 닫는다. 이제 준비 완료, 이 과정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여러 차례 반복해야겠지.




나는 앞으로 이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내 기억을 구체화한다. 이 방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에 드는 예감은 그리 나쁘지 않다.




우선은 지금 이 상황을 기록해야겠지. 필름을 장전하기 위해 장전 레버를 당긴다. 톱니에 맞물려있는 필름이 필름 통에서 끄집어내지는 느낌이 엄지손가락을 통해서 생생히 전달된다.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댄다. 뷰파인더 유리창 너머로,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필름 박스가 보인다. 박스의 한 모퉁이에 초점을 맞추고… 찰칵. 슬레이트가 쳐졌다. 재촬영은 불가능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이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라면, 그 기록을 구체화하기 위해선 필름을 현상해야겠지. 그래 이렇게 일을 벌여 놓은 참에, 집에 작은 암실을 만들어 버릴까? 쓰지 않는 화장실이 하나 있었지.




아직 완벽히 구상화하지 못한 생각들을 떠안고 메모장을 닫는다. 그때 불현듯 주인아저씨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필름을 모두 썼을 때만 셔터 룸을 열게, 그렇지 않으면 남은 필름까지 모두 타버리거든”




완벽한 준비 없이 이루어진 결단에는 부작용만이 존재한다는 것일까. 필름은 끼워졌고, 셔터 룸은 닫혔다.






무지를 동반한 용기는 만용이라고 했던가. 장판교를 향해 달려가던 병사도, 장비의 늠름한 모습을 보기 전에는 기세가 등등했겠지. 그리고 목이 단칼에 날아간다. 현관 앞에 쌓인 무시무시한 양의 택배를 마주한 내가 그렇다. 내가 어쩌자고 이렇게 큰일을 벌였는지….




화학 시간에나 만져봤을 듯한 유리병들과 액체들. 필름을 현상할 때 필요한 도구들이다. 급하게 마련한 빈 책상 근처에 물품들을 우선 옮겨 놓는다. 몇 분인가가 흐르고 이제야 허리를 피나 싶었는데, 상자 개수를 세어보니 하나가 비었다.




‘아, 스캐너가 아직 오지 않았구나’




필름은커녕 카메라에 대한 기본 상식이 전무했던 나는, 필름을 현상한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 우선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선, 필름의 종류가 무엇인지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의 약품이 필요했다. 현상액, 표백정착액, 안정제, 그리고 이 용액들을 보관할 유리병들. 게다가 필름을 다루기 위한 도구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막대한 지출에 속이 쓰렸더랬다. 게다가 암실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요즘 세상에는 빛이 새어 들어가지 않는 가방을 사용한다나 뭐라나.




띵동-




때마침 마지막 물건이 도착했다. 포토 스캐너다. 사진을 찍어서 기억을 남기기로 마음을 먹은 후, 필름 현상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필름을 단순히 현상하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현상화된 필름을 정확한 이미지 자료로써 보기 위해서는 스캔이 필요하다는 것. 그 스캐너는 비싸다는 것. 내가 그걸 사고 나면 통장이 텅 비게 된다는 것. 이 모든 사실들은 메모장에 따로 적어두지 않더라도 선명히 남을 정도로 명확하다는 것. 그 때문에 굳이 필름 카메라를 선택한 것에 후회되기도 했다는 점….




그래도 어떡하나. 내가 처음으로 찍은 사진은 필름인데. 그때 남긴 첫 순간은 카메라 속, 덜 펴져 돌돌 말린 필름에 남아있다. 아직은 카메라 뒤판을 열 때가 아니다.




우선 이 사실들을 기록해야겠지. 택배 박스들이 쌓인 것이 잘 보이게,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의 이름이 잘 나오게 사진을 찍는다.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200분의 1초 동안의 정적이 반복된다. 이러고 있으니 꼭 사건 현장을 기록하는 과학수사대가 된 것 같기도.




틱-하는 소리가 난 후, 더 이상 필름이 넘어가지 않는다. 주인아저씨의 말이 맞다면, 장전되어있던 필름이 끝났다는 소리겠지. 마침 잘 되었다. 현상 용액들과 포토 스캐너, 그리고 다 쓴 필름까지. 처음으로 현상을 시도할 수 있겠다. 물론, 스캔까지.




장황히 나열되어있는 이 도구들. 이에 대한 설명은 일전에 주인아저씨께 여쭤봤더랬다. 우선 끝까지 감겨있는 필름을 끄집어내고, 현상 탱크와 함께 암실 가방으로 집어넣는다. 거기서 손 감각만으로 필름을 탱크 안에 끼워 넣어야 한다. 처음이라 잘 되지 않는다. 꼭 흐르는 개울가에 손을 넣어 피라미를 쫓고 있는 기분이다. 될 것 같으면서도 손아귀에 딱 잡히지 않는 이 느낌. 암실 가방을 다시 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다음은 용액들을 사용할 차례다. 현상액과 표백정착액, 그리고 안정제를 순서대로 탱크에 붓고는 다시 따라낸다. 필름이 각각의 용액에 잠겨있을 때에는 필름을 이리저리 돌려준다. 용액을 필름에 잘 묻히는 과정이랄까. 독한 화학약품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도 느껴진다. 주인아저씨가 용액을 절대로 세면대에 버리지 말라고 했던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그 냄새를 맡으면서, 마지막의 안정제를 본래 유리 비커에 옮겨 담고 뚜껑을 돌려 닫는다. 용액처리 과정이 끝났다.




이제 필름을 꺼낸다. 길게 늘어뜨린 필름의 한쪽 끝을 집게로 집어 옷걸이에 건다. 반대쪽 끝은 빈 필름 통에 살짝 끼워놓는다.




‘이렇게 해야 필름이 안 쪼그라든다고 했지’




앞으로 4분을 말려야 한다. 그동안 사진을 몇 장 더 찍는다.




타이머가 울리고, 필름을 걷는다. 36장들이 필름을 6장씩 육등분한 뒤 스캐너에 넣는다. 스캔 된 필름이 파일로 남게 되고, 그 파일들을 프린트한다. 프린트된 사진들을 순서대로 나열하고, 뒤편에 날짜를 적는다. 완성.




화학적, 물리적인 방식을 통해 뽑혀 나온 36장의 종이들이 손에 만져진다. 제일 먼저 찍은 사진인 뜯긴 필름 박스에서부터, 쌓여있는 택배 박스 사진까지. 근 이틀 동안의 기억. 머릿속의 장면과 대입해본다. 온통 뿌연 막 뒤에 가려져 있는 것 같이만 느껴졌던 내 기억들이, 조금은 선명해진 듯하다. 안개가 걷혀진 느낌은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자동차의 안개등 스위치를 켰을 때의 상황이랄까. 하기사. 이 방식도 아직은 서툴기 짝이 없으니. 점차 나아지지 않을까.




사진들을 책상 위에 나열하고, 그 모습 또한 촬영한다. 그 후 사진들을 모아 준비해놓은 파일철에 끼워 넣는다. 됐다. 하루가 마무리되었고, 이제 내 기억은 안전하다.






찰칵-




셔터가 열렸다 닫히며 내는 소리. 경쾌하다. 방금 넘어간 필름에는 물잔의 모습이 담겨있겠지. 식탁 위에 놓여진 컵. 그 컵은 투명하고, 물이 가득 차 있다. 잔을 들어 물을 마신다. 차갑다. 반쯤 넘게 삼키니 목이 아려, 삼키는 것을 멈추곤 잔을 내려놓는다.




잔에 투명한 물이 차 있다. 그 양은 반 정도. 투명한 잔에 담긴 투명한 물. 그리고는 다시 찰칵- 그리고는 틱. 이제 하루를 마무리 할 때라는 것을 알리듯이, 필름이 끝나는 소리가 울리고 나는 마스크를 쓴다.




프린터가 사진들을 뱉어낸다. 그런 광경을 바라보는 나. 주위는 매캐한 용액 냄새로 가득하다.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필름을 현상할 때 쓰는 마스크는 점차 두꺼워져만 갈 뿐, 벗을 엄두는 좀처럼 나지 않는다.




사진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기억을 정리한다. 마지막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물이 반쯤 들어찬 투명한 물잔.




‘내가 이 물잔을 반쯤 들이켜 마셨다’




이렇듯, 하루 동안의 정보들은 필름들에 새겨졌다가 골방에서 시각화된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까지도 흐릿할 뿐인 당시의 장면은, 깔끔하게 재단되어 손에 쥐어진다.




사진들을 파일에 정리해 넣는다. 책장에는 꽤나 많은 파일들이 보인다. 그러자 내심 드는 뿌듯한 생각. 또 조금은 든든하다는 마음. 내가 언제 무엇을 봤는지, 어떤 것을 마주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이다. 저 기억들이 있는 한, 앞으로도 내가 혼란에 빠지는 일은 없을 테지.




이렇게 정갈했던 나의 퍼즐은, 그녀를 만나고 일그러졌다. 잔뜩.








-131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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