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진정으로 좋은 사람일까, 아니면 단지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하고 있는 걸까?"
타인의 눈에 비친 나, 내가 아는 나
최근 S에게서 받은 편지 안에는 나에 대한 따뜻한 말들이 담겨 있었다. 어느 날은 독서 모임에서 만난 분을 통해 나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고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든 생각은 "도대체 왜?"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거나 인생의 방향성을 제시할 만큼 똑똑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타인이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나 사이의 간극이 클 때, 자연스레 의심의 꽃이 피어난다.
"혹시 내가 무의식적으로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진짜 내 모습을 알면 실망할 텐데."
인간 본성에 대한 오래된 질문
이 의문은 결국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연결된다. 맹자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선하다고 했고, 순자는 인간이 본디 악하며 교육을 통해 선해진다고 주장했다. 성선설과 성악설, 여전히 우리는 이 두 관점 사이에서 흔들린다. (나는 성악설파이긴 하다)
성선설에 따르면 선량함은 원래부터 내 안에 있던 것이다. 다만 내가 잘 인식하지 못할 뿐. 타인이 발견하는 나의 긍정적인 모습은 꾸며낸 것이 아니라 본성일 수 있다. 반대로 성악설은 선량함을 후천적 노력의 결과로 본다. 설사 처음에는 '좋은 척'에서 시작했더라도, 반복된 행동이 결국 진짜 성품이 된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선량함
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은 어쩌면 자기 안의 선량함일지 모른다. 별것 아닌 일상적 태도, 무심코 건넨 배려, 아무렇지 않게 한 위로의 말이 누군가에겐 큰 의미가 된다. 애써 '좋은 사람'이 되려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진짜 선량함이 드러나곤 한다.
의심 자체의 의미
"나는 과연 좋은 사람일까?"묻는 순간, 이미 도덕적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 나쁜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평가를 의심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는 오히려 겸손의 증거일 수 있다.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성찰과 노력이다. 본성을 믿는다면 더 잘 발현시키려 애쓰면 되고, 교화를 믿는다면 더 나은 습관을 쌓아가면 된다.
요즘 읽고 있는 Mel Robbins의 『 Let Them Theory 』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타인의 행동과 선택을 그대로 두라는 메시지였다.
Let them: 남이 자기 선택을 하게 둔다
Let me: 내 감정은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Let that be his, hers, theirs: 그 사람의 문제와 책임은 그 사람의 것으로 남겨둔다
이를 내 상황에 비춰보면, 타인의 긍정적 평가를 굳이 의심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과 감정이다(Let them). 동시에 "왜?"라고 느끼는 내 의문 역시 자연스럽게 인정하면 된다(Let me). 그리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은 결국 그들의 몫일 뿐이다(Let that be theirs). 나는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런 자기 성찰 능력은 조직에서도 귀중하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개선하려는 사람은 신뢰받는다. 동료들의 긍정적 피드백을 겸손히 받아들이되 자만하지 않고, 비판적 피드백도 방어하지 않고 성장의 기회로 삼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건강한 조직 문화를 만드는 핵심 요소가 아닐까.
불완전한 인간다움
완벽한 선량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행동에는 언제나 여러 동기가 섞여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S의 편지와 S님의 존경의 표현을 통해 나는 모르던 나를 발견했다. 그것을 계기로 더 진정성 있게 살아가려는 것. 바로 그 과정이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길 아닐까.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중요한 건 그 과정 자체에 담긴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