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노마 Jan 27. 2022

HR 주니어가 서비스기획 주니어가 되기까지


나는 폭풍이 두렵지 않다. 나의 배로 항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까
- 헬렌 켈러


 1년 전 몹시 더웠던 여름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머리도 손질하고 잘 다려두었던 셔츠를 꺼내 입었다. 만들기가 어려워 시도하지 못했던 딤플도 이쁘게 만들어 넥타이까지 맸다. 조금 더 공들여 구두를 닦고, 자주 뿌리지 못했던 아끼던 향수를 뿌렸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한번 더 가다듬고 회사로 향했다. 그날은 HR 주니어로써의 마지막 날이었다.



인수인계서는 미리 다 작성해 전달을 해두었고,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수행한 업무는 채용이었는데, 면접이 진행되는 날이라 면접자 안내 등 간단한 진행업무를 수행했다. 며칠에 걸쳐 무거울만한 짐은 다 옮겨두어서 막상 퇴사 당일날 챙길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팀원들이 전해준 선물만 손에 쥔 채 회사를 나왔다. 차마 얼굴을 보고 마지막 인사 메일을 쓸 수 없었다. 회사에서의 평소 내 모습보단 조금 더 진지하고 차분하게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팀원과 몇몇 친했던 직원에게 메일을 썼다. 회사를 떠나고 나서 메일이 발송될 수 있도록 예약을 걸어두고, 친분이 있던 기기 담당자에게 예약 메일 발송 후 초기화를 요청해두었다. 그렇게 회사를 나선 지 얼마 안 돼 예약 메일이 발송되었다. 정말 끝이었다. Adieu!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단순히 일에 대한 권태는 아닐지, 혹은 잠깐 스쳐 지나갈 번아웃은 아닐지 끊임없이 물었다.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어온 선배를 찾아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찾고자 했었다. 하지만 결국 난 그 누구로부터도 답을 얻지 못했다.


올레길을 하루에 30km가 넘게, 약 100km를 혼자 걸었다. 그리고 걷는 동안 끊임없이 나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몇 번이고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회사가 그만두고 싶다, 왜 그만두고 싶을까?, 일이 싫어져서? 왜 일이 싫을까?, 일이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의미를 찾는가, 왜 그것에서 의미를 찾는가" 등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다. 수도 없이 많은 왜를 던지다 보니 어느 순간 한 곳으로 귀결되는 답이 생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의심돼 몇 번이고 길을 걸으며 물어왔다. 답은 다름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럼 HR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던 건가? 난 왜 HR이 하고 싶었지?", "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지?", 선택을 앞두고 스스로 그럴싸하게 합리화를 하는 것은 아닌지 너무나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 올레길을 걸으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언제 즐거웠고 행복했는가"

모든 선택은 후회가 남는다, 그것이 좋은 선택이든, 나쁜 선택이든. 올레길에서의 마지막 질문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도전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선택에는 후회가 남기에 앞으로의 내게 달려있었다. 그렇기에 "그때 해볼 걸"이라는 후회보다는 "조금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남기고 싶었다.






 큰 결심 끝에 퇴사를 하고 나서는 휴식을 핑계로 열심히 먹고 자고 쉬었다. 바로 무언가를 시작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휴식을 고파했다. 대학 입학을 시작으로 첫 회사에 들어가기까지 군대를 제외하고는 휴학을 해본 적이 없었다며 휴식을 택했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때론 오랜 기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기껏 큰 결심 끝에 4개월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휴식으로만 보내다니..'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내게 있어 이 휴식 기간은 2021년을 버텨내는 체력이 되어주었다. 서류와 면접 탈락의 쓴 맛을 볼 땐 간혹 "조금 더 일찍, 더 열심히 할 걸"이라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쉬지 않고 바로 달리기 시작했더라면 과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으로 내 지난 시간을 애써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2021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시작하며 운동도 함께 시작했다. 취업준비가 정신적 체력뿐만 아니라 진짜 신체 체력을 요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간단한 헬스라도 병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PT를 받아본 경험이 있어 줄곧 혼자 운동을 잘하곤 했지만, 혼자 하는 운동이 모두 그렇듯 때론 그럴싸한 자기 합리화로 운동을 넘기기 십상이었다. 이때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을 찾아 시작하게 되었다. 취업준비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활동을 몇 가지 꼽자면 시간관리와 역기획 스터디, 그리고 크로스핏을 자신 있게 선택할 수 있을 만큼 내게 아주 큰 힘이 되었다.

(크로스핏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른 글을 통해 다뤄볼 예정이다.)






정말 힘든 일이지만 탈락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했다. 헬렌 켈러의 말처럼 나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배를 항해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가 배운 항해하는 법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았다. 자격증을 준비했던 이유, 역기획을 진행하며 알게 된 것들, 인생의 큰 선택을 앞두고 했던 고민들, 솔직하게 풀어냈다. 그래서인지 과거였더라면 당황했을 법한 질문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내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Q. 정말 서비스 기획 직무만 지원하셨었나요? HR 경험도 그렇고 학교에서의 경험도 그렇고 기획 직무 이외에도 다른 직무에 충분히 도전해볼 수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A. 네 서비스 기획 직무만 지원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원 이력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웃음). 앞서 답변드린 것과 유사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자 퇴사를 결심했고 여러 도전을 해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HR 직무와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는 것은,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하고 싶은 일인 서비스 기획 직무를 준비했습니다.


위 대화는 실제 면접관과 나눴던 대화이다. 어떻게 보면 다소 공격적인 답변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난 그것보다는 솔직함을 택했다. '하노마'라는 사람을 온전히 전달하고 평가받기를 원했다. 첫 취준 시절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솔직한 자기소개서 답변을 작성하기도 했다. 때론 포트폴리오에 시간관리를 담아 전달하며 "난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였고, 내가 생각하는 항해하는 방법이었다.





바다는 늘 한결같다. 언제 폭풍우가 몰아칠지 예상할 수 없고, 방금까지 폭풍우 치던 바다가 언제 잠잠해질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한결같다. 앞으로의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언제 폭풍우가 칠 지, 또 언제 잠잠해진 바다가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다만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 어떻게 항해해야 할지, 잠잠해진 바다에선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조금이나마 깨달았기에 바다에 맞춰 항해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폭풍우가 몰아칠 수도 있고 이레적으로 잠잠하기만 한 바다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지나갈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미처 몰랐던 항해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Main Photo by Javier Allegue Barros on Unsplash

*Photo by Ben Rosett on Unsplash
**Photo by Maximilian Weisbecker on Unsplash


매일 아침이면 하루를 뿌듯함으로 시작하기 위해 운동을 갔습니다. 다녀와서는 바로 가방을 메고 카페로 향해 저녁시간이 지나도록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취업준비도 했습니다. 모든 시간을 취업준비에 할애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어머니와 치맥 타임을 보내기도 하고, 함께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도 했습니다. 형이나 아버지가 집에 올라오면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비싼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친구를 만나 술자리를 갖기도 하고, 주말이면 운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러닝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정말 너무 글이 쓰고 싶을 땐, 과감히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마음이 따듯하지 않은 것 같을 땐, 마음을 데워줄 책을 찾아 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조금 덜 지치고, 조금 더 많이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뛰지 않고, 걸어온 길의 풍경을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시없을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급히 달리느라 귀중한 풍경을 놓치고 계시진 않은가요?, 혹은 슬며시 들어온 행복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흘려보내고 계시진 않은가요?, 글을 읽으신 이번 설 연휴만큼은 풍경과 행복을 즐기실 수 있길 빕니다.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노마 드림.


2022. 01. 27.

오래 전 작성해둔 글을 이제서야 발행해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작가 카드?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