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서의 성숙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타인과 상호관계를 맺고자 하는 존재론적 특성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상호관계를 맺는 주요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그것은 곧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이자 또한 확인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존재론적 욕구인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저마다의 상황과 사정이 있겠으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누구도 질문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으니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들어주는 사람도 없으니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존재론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결핍을 가진 채 고립되어 있는 우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디지털 미디어다. SNS, 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디지털 미디어가 우리의 말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보다는 훨씬 더 자극적으로 시각과 청각을 만족시키며, 속도감 있게 내용을 전달하는 콘텐츠에 우리는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미디어의 흐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우리의 존재론적 특성을 위축시키며, 동시에 우리의 인간됨을 지속적으로 훼손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흐름을 거스르며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말’이 이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말이 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질문’이다.
바탕 질(質), 물을 문(問). 질문은 그 바탕이 무엇인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며 대상을 향한 아주 깊은 관심으로 비롯되는 것이다. 즉, 타인을 향해 질문하는 행위는 곧 상대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며,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윤리와 돌봄 철학으로 유명한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말하기를 ‘말은 단지 하나의 기호가 아니라 타자의 현존이며, 나의 책임을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즉, 상대방의 존재가 이 세계에서 인정되기 위해 내가 상대의 말할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극적으로는 잘 듣는 것으로, 적극적으로는 질문하는 것으로 말이다.
상대를 알고자 건네는 질문은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질문한다는 것은 상대로 하여금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마치 심폐소생술을 하듯이 생존을 위한 힘을 불어넣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이러한 질문을 건네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