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다큐멘터리를 본다.
이야기가 많지 않고,
설명보다 침묵이 더 오래 남는 화면들.
그 안에 있다 보면
마음이 조금 늦춰진다.
얼마 전 본 다큐는
반딧불이를 23년간 찍은
한 사진작가의 기록이었다.
반딧불이는
찾아가서 볼 수 있는 빛이 아닌,
계절과 시간,
밤의 습도와 어둠의 깊이까지
모두 맞아떨어져야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그 까다로운 조건 속에서
사진작가는 한 방향만 바라보고 걸었다.
궁금해진 것은
이유였다.
하지만 다큐는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끝내 말해 주지 않는다.
대신
그가 비워 둔 밤과
그 밤에 남겨진 사진들만을 보여 준다.
그것만으로도
묵묵히 걸어온 이유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반딧불이의 빛은
열이 없다.
몸 안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
순간적으로 만들어 내는 냉광이다.
세상을 밝히기 위한 빛이 아니라
서로를 부르기 위한 신호.
짝짓기의 시기가 되면
그들은 빛을 깜박이며
정확한 리듬으로 응답한다.
짧고, 작고,
형체보다 먼저 사라지는 언어.
도시의 빛 아래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신호다.
별빛과 달빛만 남은 숲과 물가에서,
어둠이 충분할 때에만
그 빛은 작동한다.
어쩌면 사진작가는
그 빛 자체보다
그 빛이 허락되는 밤을
알아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불을 켜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시대에,
그는 불을 끄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택했다.
편리함보다
등장할 가능성을 남겨 두는 선택.
조건이 맞지 않는 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빛이 오지 않은 밤을
실패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밤들 역시
다음 신호를 위한
정확한 준비였기 때문이다.
그가 지켜 온 것은
반딧불을 붙잡겠다는 집념이 아니라,
그 신호가 흐려지지 않도록
밤을 훼손하지 않는 태도였다.
수많은 작은 빛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순간,
그 장면은
환하거나 요란하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놓쳐 버릴 만큼 미세하다.
그러나 그 차가운 빛들이 모일 때
밤하늘의 별빛과 이어진다.
어떤 빛들은
세상을 밝히지 않는다.
대신
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남긴다.
사진작가에게
반딧불이는 목적지가 아니라
기다림 끝에 허락된 등장이었다.
그는 그 등장을 위해
어둠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었고,
그 차가운 열광은
속도를 늦춘 밤에서만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