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없다

by 글 쓰는 나그네


아내가 없다.

깊어가는 저녁, 홀로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신형철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다 내 안에 감춰진 슬픔을 들추어낸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기쁨을 공부하는 기쁨을 배워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이 있는데... 갑자기 다가온 적막함과 고요함이 두려워졌다. 혼자라는 기쁨보다 외롭다는 슬픔이 엄습해 왔다. 이 슬픔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를 바라야 한다. 괜히 싸우다 언짢아지거나 정이 들면 흘려보낼 수 없다. 흘리지 못하면 내 안에 가둬야 한다. 지금도 다양한 아픔과 외로움 불평과 두려움이 온몸 구석구석 박혀 있는데 슬픔까지 가둘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 슬픔까지 공부해야 할까?

혼자라 외롭다고 글로 하소연하니 '여름'이가 들었나 보다. 자기 방에서 나와 어슬렁 걸어왔다. 그리고 내 옆 배게에 드러누워서 코 까지 골고 잔다. '당신 혼자가 아니야. 내가 있잖아!'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여름이는 우리 집 반려견이다. 벌써 4년의 시간을 함께 한 가족이다. 말하지 못해도 표현은 할 줄 알고 이해하지 못해도 눈치는 빠르다. 먹는 것 주면 좋아하고 놀아주면 즐거워한다. 서로 교감을 맞춰가는 코드가 일치할 때 사람과 개의 관계를 넘어 가족의 정을 느끼게 된다. 이름도 가족 공모를 거쳐 선정했다. '여 씨'성을 따서 우리 집 막내라며 여름이라고 지었다. 이름이라는 것은 참 묘하다. 부르고 부르다 보면 더 애정이 가게 된다. 아마도 그 이름(여 씨 성이 결합된) 안에 동질감이라는 연대의 단어가 숨겨져 있나 보다.

아내의 빈자리에 설거지거리만 가득하다. 저걸 언제 해야 하지? 나가면서 '설거지'라는 단어 한 마디 훅 던져주고 갔다. 던지면 되받아쳐야 하는데 던지면 무조건 잘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설거지라는 단어가 화살처럼 훅 날아와 박혔다. 먹을거리는 없는데 치울거리만 남았다. 아내는 여자들끼리 친목모임에서 기쁨을 노래하며 배부르게 먹을 것이고, 나는 슬픔을 공부하다 허기진 배고픔에 여기저기 뒤적이다, 결국 고무장갑을 끼게 될 것이다. 미끄러운 세재와 거칠한 고무장갑의 만남에서 부부의 모습을 찾게 된다. 세제는 아내, 고무장갑은 남편의 느낌이 든다. 둘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소명이 있다. 일반 그릇은 차가운 물로 가능하지만 기름기 농후한 그릇은 따뜻한 물로 해야 잘 지워진다. 부부의 모습도 설거지를 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먹고살기 위해 맛나게 음식을 준비하지만 먹은 이후 깨끗하게 처리하는 과정이 함께 필요하다. 부부는 이렇게 무언가를 함께 만들고 함께 치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 치우는 과정이 차가운 물로만 가능했는데 이제는 따뜻한 물이 필요할 때가 많아졌다.

처음엔 서로 다른 모습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호기심에 한 발짝 다가가며 사랑이라는 마법에 이끌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함께 연대하게 된다. 이런 연대가 나쁜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초가 녹아 함께 눌어붙어 있는 끈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초에는 작은 초가 여럿 주변에 함께 있다. 촛농이 녹아 작은 초로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작은 초가 힘을 갖고 일어서서 불을 밝힐 수 있도록 함께 연대하는 것이 가족이다. 그 초가 잘 세워지도록 하는 것이 가족의 힘이다.

아내는 여전히 없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 다만, 반드시 돌아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만한 신뢰와 애정은 끈끈하게 눌어붙어 있는 촛농만큼 잘 쌓여 있다. 아내가 돌아오기 전 반드시 해야 될 소명이 남아 있다. 아내가 막 던진 한 단어, 설거지. 이제는 설거지 타임이다. 더 늦기 전에, 임무를 완수하고 아내가 부르는 기쁨의 노래에 편승해야 한다. 그게 우리 부부의 모습이고 나의 삶이다.

설거지를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쓴 글을 마무리한다. 더 깊은 묵삼을 담아야 하는데 설거지 때문이라는 핑곗거리를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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