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만둔 건 직장이 아니야.
29살이 되던 해, 배우라는 직업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습관처럼 달려오던 길에서 더는 열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건 좋은 딕션, 사람을 대하는 능력, 그리고 대사를 빠르게 외우는 암기력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해 보며 머릿속으로 가능한 직업들을 떠올렸다. 결국 떠오른 건, 그 능력들이 쓰일 수 있는 서비스업뿐이었다.
잡코리아에 들어가서 ‘서비스직’, ‘고객 응대’, ‘도슨트’ 같은 키워드로 닥치는 대로 검색했다. 영어 점수? 없다. 호텔 프런트는 패스—. 문서 작성 능력? 없다. 사무보조도 패스—. 그렇게 하나하나 스스로의 결핍을 확인해 나가는 잡코리아 검색은, 예체능계 출신인 내게 처음 느껴보는 현실의 쓴맛을 안겨줬다.
그러던 중 한 회사의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밝은 미소’, ‘고객 응대 경험자’라는 문구. 이건 할 수 있겠다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어떤 스펙도 요구하지 않았다. 오직 미소와 경험.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월급을 받으며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그렇게 나는 리셉션 업무를 시작하게 됐다. 사옥 안 안내데스크에 앉아, 몸에 딱 붙는 유니폼을 입고 미소를 지었다. 임직원들과 외부 방문객들을 응대하며 출입증을 발급하는 것이 내 주요 업무였다. 배우의 길을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소 짓기, 간단한 응대, 출입증 발급이 전부였다. 누군가에게는 안정적인 일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이 일은 스스로를 점점 작게 만드는 경험이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고 업무에 익숙해질수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일주일 중 5일의 절대적 시간을 여기서 보내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아침 8시, 바쁘게 출근하는 직원들. 팔에 문서를 끼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외부 인원과 협력사와의 회의를 준비하며 바삐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내가 있었다. 나는 데스크에 앉아 그들이 하루하루 무언가를 이루는 과정을, 유니폼을 입은 채, 밝은 미소로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하면서 매일 입는 유니폼이 마치 내 숨통을 조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출퇴근용으로만 입는 옷들이 옷장에 점점 쌓여갔고, 내 생기와 취향, 색감은 그 안에서 먼지가 되어 갔다.
안내데스크는 회사의 얼굴이라는 말 아래, 나는 보기 좋은 인형처럼 대우받았다. 정장 바지 대신 라인이 드러나는 스커트를 입어야 했고, 앉아서 일하는 8시간 동안도 늘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 누군가 오면 바로 일어나 인사를 해야 했고, 그게 내 ‘주요 업무’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면, 몸은 멍해졌고, 마음은 늘어졌다.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의욕이 따라주지 않았고, 그저 지금 이 상태에 순응하며 월급을 받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인원 감축 얘기가 나오고 있어요. 데스크에 앉아 있는 것보단, 출근 시간에 출입 게이트 앞에 서서 직원 한 분 한 분께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건 어때요? 좀 보여주기식으로 말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했다. 그동안 내가 하고 있던 일이 무엇인지, 나를 얼마나 작아지게 내버려 뒀는지 비로소 또렷하게 깨달았다.
그날, 나는 조용히 마음을 정했다. 이번 달까지만 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리셉션을 그만두었다.
내가 그만둔 건 직장이 아니라, 스스로를 더 이상 작게 만드는 방식의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