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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Feb 10. 2020

젊은 생각, 젊은 글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hard boiled  문체를 공부하고 싶어 요즘 그의 책을 다시 읽고 있다.


그런데 웬걸, 어려서 몰랐는데 그의 책이 재미없다. 마치 흑백영화 보는 기분이다.


요즘 독서를 편집자의 시선, 작가의 시선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책의 공백에  헤밍웨이 문장을 내가 고치고 있었다. 물론 번역이 상상외로 심각했다. 내 영어 실력이 출중하지 않아도 어떤 영단어를 가지고 번역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잠시 책을 덮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왜 헤밍웨이가 이렇게 마음에 접속이 안될까?


글은 생각을 대변한다.


모두가 알듯, 생각은 한 개인의 삶에 녹아든 수도 없는 많은 것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단시간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은 발원하고 변질되고 침투당하고 버티고 그러면서 자란다. 많은 작가의 글이 조금은 고독하고 비판적인 이유는 일반사회의 사람보다 훈련하고 관찰하며 생각이 자라기 때문이다.  고독한 책상은 바로 생각의 전장이다. 헤밍웨이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필가들의 글을 읽을 때도 약간 당황스럽다. 과거의 수필과 요즈음 글은 질감이 다르다. 


문체는 드라마나 영화의 배우와 같다고 본다.

글의 구조를 완성하고 한 줄 한 줄 문장을 만들어가다 보면 작가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동원돼 연기자의 연기처럼 유려하고 독특한 색을 문장에 입혀야 한다. 독자들은 눈으로 글을 보고 뇌로 글의 표현을 재 조합한다. 독자는 각자의 독서능력에 따라 뇌에 그려진 그림을 해석하고 재배치하고 이해하거나 반론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문체는 드라마 주인공 연기처럼 독자에게 읽힌다.


헤밍웨이를 이제 그만 만나고 헤어지기로 했다.


내가 젊은 철학자 스벤 브링크만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선명한 언어 때문이다. 그는 주장을 주저하지 않는다.  돌려 말하지도 않고 어렵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번역을 잘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적어도 번역가에게 쉽게 읽히는 책은 독자들에게도 쉽게 읽힌다. 그래서 요즈음은 젊고 쉬운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글에서 저자의 나이가 보이면 순간 호감이 급하락 하는 것을 잠깐 느낀 적이 있었다. 진부하다고 느끼는 선입견 때문이다. 배울 것이 있으면 니체나 칸트 같은 조상님에게 배우지, 같은 시대의 아버지나 꼰대 같은 선배에게

인생을 훈수받기 싫은 짧은 생각 때문이다. 글쓰기 선생들은 글을 잘 쓰도록 가르치는 것이지 글의 근본 생각이나 삶을 지도할 순 없다.


나는 지인들에게 골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들은 제법  빠르게 성장한다. 빠른 성장 이유는 돈 주고 배우는 코치와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료 코치는 학생에게 집중하지 못한다.  학생이 일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돈 받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에 보람이나 사랑을 보상으로  받는다. 내 노력의 기쁨은 그(그녀)가 빨리 성장해서 혼자 힘으로 필드에 나가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그녀)가 필드에 나가 100타를 깨면 그에게 험난한 골프의 인생은 다시 시작된다. 그것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를 반복하는 일이다.


골프가 신이 내려준 최고의 스포츠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멘털 Mental과 기술 그리고 골프장(환경)을 다 이기는 경우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때가 되면 골프가 "자기나 적과의 싸움"이 아닌 "자연에게 받는 레슨 lesson"임을 알게 된다. 글도 그렇게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젊은 글은 젊은 생각에서 나온다. 젊은 생각을 유지하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젊은 생각이란 유연함을 기초로 한다. 세상 무대는 빠르게 세대교체 한다.  그와 동시에 아주 빠르게 언어, 습관, 문화, 놀이, 가치 등이 "그 당시 현재를 지배하는 세대" 들에 의해 재편된다.  방송국처럼 "프로그램 개편"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무대 위의 세대란 통상 40대와 50대다. 이들은 축구에서 공격수와 수비수 사이의 역할을 하는 미들필더와 같다. 기성용과 구자철 혹은 토트넘의 에릭센 같은 선수가 그 역할을 한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이들이 경기의 엔진 같은 존재다.  사회도 40대와 50대의 무대가 중요하다.


이 세대가 힘을 가질 때 국가는 도약을 한다.  문제는 이 무대 위의 시간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위로는 어르신?을 모시고 아래로는 청춘들을 이끌어야 한다. 


자기 정체성이나 삶의 철학을 살필 시간도 부족하다. 자기주장 없이 세상 무대에 전념하다 60에 은퇴하면 이거 큰 문제다. 무대 아래 생활은 "생존전략"이 아닌 "삶의 전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대 위나 아래에서 계속 젊은 생각을 유연하게 유지하는 것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자기주장도 선명하게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너무 주장하면 꼴값이 되고 너무 없으면 투명인간이 된다. 그 중간, 적정한 수준을 잘 유지하고 관리하는 능력이 젊은 정신의 핵심이다.




학부시절 진지하게 만나던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키는 조금 작지만 귀여운 외모에 음대 피아노 전공이라 나는 금방 마음을 빼앗겼다. 음악 하는 여자를 이상형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월남전 군목으로 참전하고 서울의 모 대학의 교목실장으로 재임 중이었다. 우리는 교제를 알리고 허락받아 가족 같은 분위기로 사귀게 되었다.


그녀 아버지 에게는 외국 손님이 많았다.


"혹시,  영어는 불편하지 않지?"


어느 날 그녀 아버지가 외국인과 합석하게 하려고 나에게 물었다.


" 네, 그럼요"


난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암기와 시험영어에  능숙하지  미국인을 상대하는 실전 영어에는 경험이 없었다. 외국 손님과 약속을 잡은 일주일 전부터 그 당시 유행하던 "아무개 영어회화" 책을 달달 외웠다. " 식당에서, 공항에서......" 그런 거.


생존 영어에 온몸을 다 바쳤다. 지금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약속 날이 다가왔고, 그 당시 드문 퓨전 한정식 집에 모였다. 실내는 현대식이고 메뉴는 전통 한식으로 정갈하게 차린 상차림이었다. 그 자리에는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도 함께 참석했다.


어쩌면 장차 나의 장인 장모 앞에서 첫 번째 영어능력을 테스트받는 자리였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영어를 잘하면 훌륭한 사람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외국인은 60대 후반의 젊은 할머니였다. 몸은 뚱뚱하나 금발에, 젊어서는 미모가 출중했을 것 같은 밝은 여자였다. 예비 장인어른이 가족을 소개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내 옷 주머니에는 "아무개 생활영어"와 함께 자그마한 "포켓 생활영어"도 숨겨져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내가 주도했다.


책에 나온 대로, 외운 대로, 연습한 대로.


문제는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외워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렴 어때 그것도 영어인데.  

하지만 내 능력 한 가지를 더 말하면 분위기 잡는 은사가 있었다. 바로 " 하하하" 큰 목소라로 웃기.


이건 영어가 막히거나 알아듣지 못하며 분위기 따라갈 때 쓰는 회화 기술이다. 훗, 또 웃음이 나온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모임의 압권은 후반이었다.


전채를 appetizer 먹고 메인 main이 나올 때  "많이 드세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영어로 떠오르지 않았다. " 잠시 화장실 좀."  화장실로 직행했다.


주머니 안에 감춘 포켓 생활영어를 보려고 나온 것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회화책을 황급히 펼쳐 들었다. "많이 드세요, 'Help yourself'"(지금 같으면 그냥 Enjoy your meal  혹은 Please enjoy 할 텐데 Tuck in, Dig in 도 편한 상대에게 쓰고)  


 화장실 안에서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 헬프 유어셀프, 헬프 유어셀프, 헬프 유어셀프"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을 때 미국 손님은 그녀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가 잠시 멈춘 순간, 참았던 설사를 쏟아붓듯 외운 것을 쏟아내야 했다.


"헬프 유어셀프"


그녀가 나를 돌아보더니 막 소리 내며 한참 웃었다.


"하 하하(머지?)"


왜 웃었는지 지금은 알 것 같다. ( "바보야, 문제는 상황이야")


상황에 안 맞는 회화를 던졌으니 웃길 수밖에. 그날 식사는 나의 영어회화 울렁증 말고 어려움 없이 그렇게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dessert 가 나왔을 때 그녀의 나이가 60대가 아니라 70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그녀가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 나는 아직 젊어. 내 마음은 소녀라고 "


그때 그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몸이 늙어도 마음이 젊으면 젊게 살 수 있음을. 지금도 그 생각은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늙어가며 퇴화하던지 진화의 끝을 경험하던지 두 갈래 길을 선택해서 간다.

연어가 그들이 태어났던 산속 자갈밭에서 마지막을 그렇게 몸부림칠 때

어쩌면 그들은 생명의 절정을 맛보며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지 모른다.


젊은 생각과 젊은 글은 마지막까지 소중히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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