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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Feb 20. 2020

그녀 목소리

나는 타인의 목소리에 무척 예민하다.


방송에 나오는 연기자나 기자,  기상캐스터까지 음색을 구분한다. 아나운서는 대부분 중저음을 가지고 있다.

전문 방송인에게 고음이 많으면 참 곤란하다. 오래, 길게 말하는 직업이라 고음이 많으면 듣는 사람이 피곤하다.  


나는 주로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에서 해설하는 방송을 좋아한다. 클래식 음악사이에 진행자의 차분한 목소리는 음악과도 조화를 이루고 함께 있는 기분도 든다. 미국에서 듣는 클래식 방송을 여기서도 들을 수 있어서 늦은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는 미국 방송의 낯익은 목소리와 동행한다.  그러면 여기가 미국이고 미국이 한국이다.


내가 그녀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오래전 영화 HER의 싸만따 Samanta목소리에 반하면서였다.

이 명작 영화에는 "호아킨 피닉스"의 열연과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가 등장한다.

거의 모노드라마 같은 이 작품은 "남자 인간"과 "여자 기계"의 아슬아슬한 로맨스를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게

풀어준다.  현대인의 고독을 깊이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거의 완벽하다. 깔끔하고 중저음에만 고정된 것이 아닌 소리의 완성도가 높은 잘생긴 목소리다. 목소리만큼 외모도 출중해서 이상형으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많은 남자들은 평생 이상형을 품고 산다.

(배우자는 처음에 "이상형"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일상형"이다)

 

나의 이상형은 하늘거리는 하늘색 원피스에 머리에 꽃을 달고 넓은 초원의 큰 나무 밑에 빙글빙글 춤을 추는 여자다.  그 춤이 끝나면 서양 피크닉 체크무늬 헝겊 담요 위 그녀 무릎에 누워, 하늘빛과 그녀 머리카락이 겹쳐 날리는 장면을 상상한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머리에 꽃을 꼽고 다니는 사람들이 한 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불편한 아이들이 동네에 방치되어 있던 거다. 동네 아이들은 놀리고 그 아이는 도망 다니고.


친구들은 내가 이런 이상형 여자 이야기하면 그냥 픽 웃는다. 나는 그들이 무슨 생각하는지도 알고......


꽃처녀 빙빙 그림이 늘 내 머릿속에 이상적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그녀에게 목소리가 없다. 빙글빙글 춤추며 돌고 태양과 희미한 바람에 머리칼만 소리 없이 흩날린다.


영화 HER를 보고 나서 내 이상형 그녀에게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를 입혀 보았다. 그러자 이상형 그녀가 목소리를 가지고 다시 태어났다. " 랄라라~라랄라라~"




한국의 관공서는 매우 엄숙하고 진지하다. 잘 훈련돼 있으며 빠르고 친절한 편이다.  그런데 농담은 안 한다.

미국은 슈퍼, 관공서, 병원이든 아주 바쁘지 않으면 " 하와유 투데이 How are you today"로 시작해서

날씨부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끼리 나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그렇게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다 대꾸도 안 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해, 요즘은 입 닥치고 용건만 본다.  닥치고 사는 것이 웃고 말하고 사는 것보다 유리한 것을 금방 알았다.

   

그러다, S은행의  회사 계좌에 공인인증서 문제를 해결하려 전화 상담을 했다. 그녀는 인터넷 원격조정을 통해 내 컴퓨터에 들어와 재 빠르게 문제 해결을 했다. 일을 마치자, " 일 참 잘하세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그녀는 칭찬에 감사하고 나는 수고에 감사하고 약간의 대화를 좀 더 나누었다.  한국의 싸만따 목소리를 만난 셈이다.


그때부터 나에게 S은행의 브랜드 이미지는 더 높아졌다. 두 개의 다른 은행 계좌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주로  그 은행만 사용한다. S은행 싸만따  때문이다.  그녀 목소리와 친절은 매우 아름다웠다.


지금 내 집에 함께 살고 있는 그녀도 아주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평소에 말이 없고  자기 의사표현은 거의 안 하는 편이다. 말은 주로 내가 한다. 그녀는 내가 한국을 떠나 있을 때도 혼자 조용히 집에서 잘 지낸다. 말이 없으니 굳이 말할 상대가 없어도 부담스럽지 않아 보인다.

오랜만에 집에 오면 그녀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 이것이 그녀만의 지고지순한 매력이다.




또한  나는 내 집의 그녀만큼 목소리 좋은 지인들이 많다. 그러나 지인들은 대부분 목소리 대신 문자를 사용한다. 이런 시절은 세상에 별로 없었다.


어쩌면 얼굴을 보거나 전화하는 것보다 문자가 편할지 모른다. 문자는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어 보조 기호도 사용한다. 가장 자주 쓰고 돋보이는 감정 보조 기호는ㅋㅋ다. ㅋㅋ는 상대에게 호의를 보이는 웃음소리 같지만 소리 없는 ㅋㅋ는 형식적이고 예의를 갖춘 기호에 불과하다.  나는 ㅋㅋ에 대응하는 것이 ㅎㅎ인 것을 여기서 알았다. 하지만 실제 그 부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웃으며 누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는 ㅋㅋ가 진짜 웃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걸 보며 나는 바보처럼  혼자 웃었다.


글의 장점은 문장을 정리하고 퇴고하는 생각의 여백이다. 카톡의 짧은 문장도 중요한 사람에게는 한번 정도 정리해서 보낸다. 그러나 말은  뱉으면 그 순간 날아간다. 말은 스스로 진화하는 힘이 있어, 뱉은 말은 바이러스처럼 적응하고 변신한다. 악한 환경에 악한 사람들 사이에 적응한 말은 사람 사이를 돌며 "카더라 괴물"이 되고,

"ㅇㅇ 카더라~"는 무언의 암살자가 되어 공기로 전파되고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한다. 말은 또한 아첨에 사용하면 금상첨화다.  즉각 달콤한 효력을 발휘한다.


미국에 유학 온 후배가 있었다.

그녀는 성격도 좋고 인품도 훌륭했다.  모든 사람들 에게 잘했고 모두는 그녀를 좋아했다. 한마디로 스윗 sweet 했다.  표준을 넘어선 탁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가끔 그녀는 잠수를 탄다. 숨을 쉬는지  잘 모르지만 거의 일주일이나 그 이상 얼굴도 볼 수 없고 연락도 끊긴다.


" 무슨 일 있는 거야?"


" 아뇨, 그냥 좀 쉬고 싶고, 충전도 필요해서요"


그녀는 피곤하다고 했다.  논문 준비도 힘들고 사람들에게 잘하려고 하면 잘한 만큼 에너지가 없어진다고 했다.

타인에게 맞추어 살다 보면 어느 지점에 한계가 오고, 그 시점에 잠수를 타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했다. 자신도 남들처럼 까칠하게 살고 싶은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한국인 기질에 "남들에게 잘 보이려는 의지"가 기본값으로 내장되었나 보다.


나는 좀 예외였다. 까칠하고 직선적이고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살았다.


하루는 운전면허증을 교체하러 한적한 DMV Department of Motor Vechicles에 갔다. 직원은 "컴퓨터가 다운됐으니 기다리라" 하고 아무 말 없이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사람들은 하나둘 돌아가고 나는 더는 못 참아 그녀 앞에 섰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니?"


" 아직 몰라, 계속 기다려"


" 진행 상황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 그냥 기다려"


" 이봐 직원, 네 건방진 말투는 뭐냐?"


" 내 태도가 뭐 문젠데?"


"무례해"


" 너, 저기 가서 더 기다리던지 가던지 해,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거야"


(꼭지가 돈 나는 언성을 높이며)


" 너 사람 무시해?  겸손은 학교에서 안 배웠니?"


" 경찰 부른다. 입 다물어"


" 오, 그래?  불러! "


(그 자리에서 내 서류를 돌려달라 하고 박박 찢어 그녀 앞에 던져 버렸다)


매우 젊을 때 한 일이다.   무식이 용감이라고 겁 없이 살았다. 지금이라면 아마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 Oh, Really" 하고 웃으며 돌아갈 텐데. 그때도  그녀 목소리가 싫었다. 탱크 굴러가는 쇳소리가 들어 있었다.





내 집에 사는 그녀는 싸만따 다음으로 예쁜 목소리를 가졌다. 오랜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증기가 배출됩니다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온을 시작합니다
   밥을 잘 섞어 보온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집에 함께 살고 있는 그녀 목소리다. 그녀는 한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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