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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Apr 29. 2020

자신의 청중이 되어 보는 것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 Escape from pretoria 2020

훌륭한 작품은 간혹 오래되고 답답한 삶의 갈증을 한 번에 풀어줄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 Prison escape (원제 Escape from pretoria, 남아공의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서 탈출)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 묻고 대답하는 영화 쇼생크 탈출을 닮은 속깊은 작품이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남아공 살육현장의 기록 필름 영상으로 눈을 열고, Mozart, Mass in C minor, K.427 'Great Mass' 키리에 -키리에는 미사 시작 예식 때 드리는 기도로, 그리스어 'Kyrie eleison(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의 소리로 귀를 닫는다.

 

주인공은 해리포터로 유명한 다니엘 래드클리프, 감독 프랜시스 아난,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작품이라는 것만 알고 영화에 도전했다.  그러나 사전 지식으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아파르트 헤이트"다.


아파르트헤이트(아프리칸스어: Apartheid)는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정권에 의해 1948년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 즉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 차별정책을 말한다. 그러나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남아공 백인정부와 흑인 대표 아프리카 민족회의와 넬슨 만델라 간의 협상 끝에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델라가 1994년 4월 27일 완전 폐지를 선언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사람을 인종 등급으로 나누어 백인, 흑인, 컬러드, 인도인 등으로 분류하였으며, 인종별로 거주지 분리, 통혼 금지, 출입구역 분리 등, '차별이 아니라 분리에 의한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사상 유례없는 노골적인 백인지상주의 국가를 지향하였다. (위키백과)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1962년 8월에 체포되어 1964년 국가 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감옥에서 무려 26년을 보내고 1990년 2월 11석방된다. 그리고 1994년 4월 남아공화국 최초의 모든 인종이 참가하는 총선이 실시되었고 넬슨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런 역사 속에 1978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프리토리아 정치범 교도소 독방에 감금되는 주인공 팀 젠킨이 404일 동안 준비해 1979년 15개의 문을 열고 탈출하는 과정이 영화의 모티브다.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탈출을 준비하는 과정과 실행에 옮기는 긴장이다. 관객들은 최소한 탈출에 성공한 결말을 알고 감상하기 때문에 흥미가 없을 것 같지만 영화는 탄탄한 연출을 통해 긴장과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 영화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인간의 존엄한 투쟁 일기다.  




기득권의 투쟁

작가의 품은 메시지를 염두하지 않고 책을 읽으면 독자는 이야기 줄거리에만 관심을 갖는 우를 범한다. 그것은 마치 사과 껍질을 깎아 영양은 버리고 속만 먹거나 포도 껍질은 뱉어내고 알만 먹는 것처럼 무지한 일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스토리 라인보다 작가의 메시지 장치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영화는 백인을 통해 백인을 고발한다.  인종차별은 서열 본능에 기인하는 원시적 동물 근성이며 우월한 존재는 이득과 동시에 권력도 함께 갖는다. 서양 역사에 도드라지는 인간차별은 그들의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피를 지불하고도 아직 채무가 완료되지 않아 보인다. 영화의 주인공은 기득권의 배경과 피부색의 특권을 포기하고 투쟁에 뛰어든다. 이런 모습은 기득권의 반성이 저항하는 세력의 투쟁보다 효과적이며 빠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들은 한국 역사의 청년들과도 닮았다.


삶의 이유

정치범 팀과 스티븐은 백인만의 감옥(바닥에도 흑백을 나누는 사회)에서 탈출을 꿈꾼다. 탈옥을 위해 그들은 15개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이 과정은 인생과 많이 닮았다. 탈옥하는 꿈이 없다면 이들의 시간은 얼마나 지루할까? 인간에게 꿈이나 계획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무료할까? 앞으로 더 건강하게 살아 이전보다 살아야 할 시간이 길어진 현대인은 어느 시대보다 슬픈 행복을 가지고 산다. 결국 우리는 길고 지루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때울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1년 넘는 탈옥 준비는 그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제공한다. 어쩌면 인간에게 삶의 이유란 "시간을 때우는 것" 아닐까?  


 미래, 현재, 과거 중 현재는 너무 빨라 가장 소홀하게 취급된다.


과거는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고 미래는 넉넉한 기회가 있어 보인다. 팀도 다른 종류의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자유는 아주 단순한 개념이라 쉽게 놓칠 수 있다". 이들처럼 인간도 평생 강철문 15개(탄생, 대학, 직장, 결혼, 진급, 내 집 마련, 성공, 자녀 결혼, 은퇴, 연금, 좋은 요양원, 좋은 요양병원, 호스피스, 장례식장, 묘지)를 통과하며 시간을 때운다. 인생이란 통과하는 과정 즉 살아가는 현재가 전부다. 탈옥의 희열을 맛보는 완성은 역설적으로 죽음이다. 이 영화에 가장 감명 깊은 엔딩 크레딧에서 잠시 생각했다. 탈옥의 기쁨, 택시 타고 가는 길, 키리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이 지점이 좋았다. 자막이 사라질 때까지 여운에 젖어 있었다. 생명을 마치는 순간 스스로 삶을 탈각(脫殼: 파충류나 벌레 따위가 껍질을 벗음)하는 행복한 웃음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사고로 죽어가는 짧은 순간이든, 암으로 죽어가는 긴 기다림이든, 편안한 임종이든 육체를 벗는 순간의 완성된 희열은 관에 실려 곧게 뻗은 모르는 도로, 미래로 나아간다.  하늘에는 키리에가 울려 퍼진다.  개인적으로 두고두고 기억할 명장면이었다.

  

자신의 청중이 되어보는 것

영화를 다 보고 잠시 인문학적 사색에 머물러 있었다.  그 안에는 탈옥에 성공한 인간승리도 있었고 평소 존경하던 만델라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 남아 있던 숙제 하나가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것은 이들의 법정과 감옥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가? 판사는 정의를 심판하는가, 불의를 지키는가? 백인 교도관은 누구인가? 공무원인가? 불의하더라도 현실에 기대 살며 안락한 인생을 살면 되는 걸까? 함께 탈옥을 권할 때 현실에 남기로 한 다른 정치범들은 정의로운가 비겁한가?      etc......


우리는 젊어서 검사 같고 중년은 판사 같고 노년은 변호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삶을 재판정 피고로 세운다면 젊은 검사는 내 삶을 정죄한다. 비판하고 증거를 대며 네가 잘못이라고 죄를 다그친다. 너의 삶이 얼마나 무능하며 죄로 가득하고 낭비했는지 증거를 대고 공박한다. (자신의 젊은 모습이 검사 같다는 뜻이다. 젊어서 자기가 자신을 얼마나 학대하는지 상상해 보라) 늙어서는 삶을 변호한다. 우리 삶은 그래도 괜찮았다고, 그만하면 잘 산 거라고 그동안 잘못한 것이 있어도 용서하라고( 늙으면 자신에게 관대하며, 줄리언 반스 말처럼 "기억은 좋은 것들로만 편집"한다)  중년은 판사 같다. 젊은 검사를 탓하기도 하고 늙은 변호사를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젊은 자식은 비판하고 늙은 부모는 무능하다며 신의 자리에 머문다.


누가, 당신을 심판자로 세웠는가?


모든 것을 알고 정의로운 것처럼 행세하지만 나도 젊어서 미숙하게 살았고 늙어서 부모세대처럼 될 텐데 완벽한 척 세상을 통달한 척 살고 있다. 이 지점에 "자신의 청중이 되어보는 것"을 생각했다. 재판 방청객, 청중이 되어 보는 것. 삶의 자리(청년은 검사, 중년은 판사, 노년은 변호사)에서 잠깐 물러나 피고 자신을 객관적 시선으로 지켜보는 청중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가 그렇게 형편없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삶을 살고 있음이 눈에 들어올지 모른다. 영화는 실존인물이 탈옥에 성공해 "치열하게 산것이 훌륭한 것" 아니라 자신이 믿는 신념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 부럽다. 아직도 인생을 치열하게  "오르기"와 '지키기"라 생각한다면 그것과  다른 인간의 모습을 보고 삶을 성찰해 보는 것도 이 영화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https://youtu.be/SGWYbkXCcGU?list=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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