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노아 Apr 30. 2020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자기중심적인 사람

내 삶의 동심원을 그리면 "나" 다음 "가족"에 해당되는 원을 그린다.


두 번째 원, 가족의 동그라미에는 혈족을 포함해 가족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내 두 번째 원에는 세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세명의 여자가 가진 공통점은 자기중심적이다. 이 단어 자기중심적, 자기 주도적, 이기적 이란 형용사는 설명하기에 좀 애매한 경향이 있다.


이기적이란 단어의 뉘앙스 nuance는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느낌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은 "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주도적은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느낌이 든다. 이 구분은 심리학자에게 맡기고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은 가족 레벨 사람들의 성격 이야기다.


두 번째 동심원 세 여자의 공통점은 같은 과(꽈)라고 표현하면 좋겠다. 농담 삼아 고양이 꽈 라고 내가 표현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착하고 예쁘게 생긴 것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심성이 착하고 연민이 많다. 그런데 가지를 치고 나가면 셋은 또 다르다.  이들 함께 생활하는 사이는 아니다. 그 가운데 나이가 제일 많은 A는 매사에 부지런하고 주도적이며 전체를 아우르는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여인 B는 개성이 강하고 바른 소리 잘하고 예리한 관찰력이 있다. 그런데 사구(死Hit by pitch)를 자주 던진다. 여인 C는 매우 고급스럽고 스마트하다. 그런데 성질이 급해서 자주 결정을 번복하고 화가 많지만 현명할 때도 있다. 이들을 상대하는 나는 어떤 스타일일까 생각해 보니 나도 자기중심적인 편이다. 굳이 말하자면 한물간 자기중심적 인간이다. 나는 누구 밑에서 일을 못한다. 평생 한 번도 고용된 적이 없고 고용하는 편이다. 교육 과정 중 잠깐씩 고용된 적이 있었지만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대등한 팀으로 일하는 것과 혼자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런 타입의 내가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만나면 참 난감하다. 행성 충돌이다. 둘 중에 힘이 약한 쪽은 깨져 사라지고 센 쪽은 큰 피해를 입는다. 지금은 그나마 "참는 중입니다"라는 팻말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이전에 비 훨씬 부드러워졌지만 참느라고 혈관이 약해져 언젠 머리가 터질지 모른다. 크던 작던 가장 많이 부딪히는 주원인은 "의견 차이"다.  나와 생각이 다를 때 그녀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다. 눈치를 봐가며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게다가 내가 남자라고 도량이 넓은 척하느라 양보한다고 내 의견을 자주 거둔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스스로 많이 제한한다. 또 나를 생각해서 해주는 상대 입장을 내 맘대로 그러면 안된다.


아주 간단한 예로 비어 있는 지하 주차장이 있다. 나는 여기 세우고 싶은데 그녀는 저기 기둥 옆에 세우라고 한다.  여기나 저기나 차이는 없는데 나는 여기를 고집하고 그녀는 저기를 원한다. 모든 생활에 이런 식으로 "여기"와 "저기" "이렇게"와 "저렇게"가 충돌한다. 결정하는 상황뿐 아니라 생각, 말에서도 이것과 저것은 반대로 작동한다. 신혼 때 자극(N vs S)처럼 작동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계속 양보하다 보면 내가 무슨 노예도 아니고 자존감 상처 입고 점점 고독해진다. 같이 살아도 독신 같다. 더 큰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잘 모른다. -반대로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생존의 중요한 동력 일지 모른다. 이 세상 모든 교수들은 솔직히 자기가 강의를 제일 잘한다고 믿는다- 이들 상당수는 삶의 전략을 복종으로 삼은 개를 제일 좋아한다. (배우자는 물고 덤비니까. 여자는 작고 착한 개를 남자는 크고 훈련된 개를 선호한다)  




나는 이 여인들처럼 아주 가까운 세명의 성직자 친구도 있다. 한 명은 캐롤릭 고 00 신부고 다른 한 명은 개신교 추 00 목사, 마지막 한 명은  불교 탁00법사다.


고 신부( 줄여서 그를 고신이라 부른다)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단짝이었다. 얼굴은 나보다 몇 배 하얗고 말수도 적고 무척 키가 커서 나는 그와 어깨동무하고 다닐 때 질질 끌려 다녔다.  그 친구가 신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월이 한참 지나 그를 만났을 때  하얀 얼굴과 로만 칼라가 너무 잘 어울려 " 딱 신부 같은 신부네'라고 놀렸다. 그는 하얗게 웃었다. 멋있어서 죽는 줄 알았다. 그는 사상도 신앙도 예쁘게 생겼다. 그때 나는 그에게 쉘비 스퐁 책을 소개받았다. 그래서 대화도 많이 하고 자주 연락하며 친하게 지낸다. 그런데 이 친구가 자기중심적이다. 친구를 만나면 어디 가서 밥을 먹을지 차를 마실지 계획 안 하고 만난다. 지가 알아서 한다. 내 의견은 묻지 않고 계획이 다 있다. 나는 이 친구 가는 대로  따라다니면 된다. 남자끼리 지만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로맨틱하다.


추 목사(줄여서 그도 추목이라 부른다)는 드물게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다. 소위 불알친구다. 내가 어릴 때 다니던 우리 학교는 서울 불암산 자락에 생긴 지 얼마 안돼 애교심을 보수로 공사장 인부처럼 가끔 작업에 동원되었다. 시간 나면 자갈도 나르고 잡초도 뽑고 학교일을 했다. 이 친구는 같이 리어카 끌던 사이다. 같은 반도 여러 번 해서 그냥 가족 같다.  그때 추목은 목사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커서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때 내가 " 너는 왜 목사가 되려고 해?"라고 하자 " 심방 가면 맛있는 거 많이 먹어서"로 답했다. 하하 진짜로 한말이다. 이런 녀석이 보수적인 자기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자유로운 신학을 가르치는 한신에 들어갔다. 한신은 존경하는 문익환 목사님이 떠오르는 한국기독교의 요람이다. 어른이 되어 다시 물었다. " 너는 왜 목사가 되려고 했어?" 내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던 그가 큰소리로 웃었다. " 너 어릴 때 그 말 기억해서 그렇지?" 한참 웃더니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 맛있는 밥 마이 쳐 묵으려고 그랬다, 왜?" 그때 우리가 너무 크게 웃어 식당 옆자리 손님들이 "미친놈들,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하듯 단체로 쳐다보았다. 사래 들만큼 한참 웃다, 물 한잔 마시고 다시 물었다. " 맛있디?" 내 말에 그는 마시던 물 마저 엎질렀다. "안 되겠다. 여기서 나가자" 그는 밥값을 내며 내 엉덩이를 정말 아프게 꼬집었다. 자리를 이동해 차를 마시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건지 모르지만 "신부나 승려는 혼자 살아 독선적인 성격이 많다"라고 했다. 혼자 살면 집에 투쟁의 대상이 없어 뭐든지 자기 맘대로 하게 되고 발전이 없다고. 개신교에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얘 부인도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추목은 인생이 엄청 발전했다. 교회 대장이 자기 마누라다. 자기는 설교만 하고 나머지 교회일은 부인이 주도해서 처리하기 때문에 처음엔 좀 싸우다 지금은 포기했다고 한다. 얘네 교회 가면 교인들이 진짜 군인 같다. 그래도 추목은 진보적 목사라 그걸 다 이해하고 타협한다. 조금 나이 들더니 추목은 진짜 종이 되었다.  주님의 종 말고 마느님 종.


탁 법사는 군대에서 만났다. 불교에 '중(衆)'이란, 절에 살면서 불법을 닦고 실천하며 포교에 힘쓰는 사람, 한자로 무리 중(衆), 산스크리트어의 상가(僧伽 승가:samgha)를 한자로 의역한 것이고 대중(大衆)이라는 뜻이다. 줄여서 중(衆)이라고 하지만, 원래의 의미가 변형되어 현재는 일반적으로 '스님의 낮춘 말'쯤 생각하고, 중(衆)의 본래적 의미는 '대중(大衆)'이다. 법사는 "법의 스승"이란  말로, 스님 가운데 법이 높은 큰 스승을 뜻하는 용어고 군대에서 군장병 대상으로 부처님 법을 전하는 ‘군종 승려’를 ‘일반 스님’과 구별하기 위해 법사로 호칭하게 되었다.(탁법한테 배웠다) 그런데 탁법은 결혼했다.(2010년 이전 법사들은 결혼하기도 했다. 그는 산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애도 있었다.  관사 이웃이었던 그의 차가 고장 나서 내 차를 하루 빌려 쓰다 친해졌다. 하루는 내 처가 탁법 아들 봐주다, 수요 저녁 예배시간이 돼서 애 업고 교회 가는 바람에 교인들에게 크게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불교와 기독교의 진정한 화해 순간이었다. 결혼했어도 탁법은 불심이 깊고 유머가 넘치는 매우 멋진 승려였다. 나는 그를 통해 불교를 배웠다. 그의 부인은 매우 조용하고 순종적인 스타일이었다.






세 명의 친구 때문에 "혼자 사는 사람과 결혼해 사는 사람이 다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앞에 이야기한 세명의 자기중심적 여인들 생각하다 친구들이 떠올랐다. 결론은 결혼생활로 부부 성격이 변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한마디로 "지성질"은 가축 엉덩이에 연기 나게 지지는 불도장처럼, 태어나며 새겨지고 남자든 여자든 한쪽이 이런 자기중심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 참고 살든지, 무심하던지, 헤어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성격이 아주 아주 조금 고쳐지지 않을까?


고칠 필요 없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이 좋다. 다만 함께 살려면 규칙을 정하면 된다. 부부의 경우라면 사건이 생길 때마다 좀 더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먼저 사과하거나 분위기 반전을 해야 한다. 앞으로 이럴 경우에 이러지 말자고 부드럽게 다짐하고 그날 하루만 다투는 것이 좋다.(자고 나면 잊은 척, 아닌 척 스스로도 속이고 상대도 속여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싸우고 산다. 서로가 죽어 없어져 먼지가 될 때까지.


혼자 지내면 가끔 인생의 자극그리울 때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던 그 시간도 삶의 일부니까. 그러나 잊지 말 것은 싸울 때마다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돌아보고 내가 변하면 견디기 쉬워진다. 그 대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어떤 경우에도"당신은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며 누구도 당신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 불변의 진리는 잊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들을 아직도 사랑한다. 나도 그들을 힘들게 할 때가 있으니까. 부처님 오신 날이라 탁법이 보고 싶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너는 맞고 나는 틀리다.
우리는 서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https://youtu.be/3DMQc76GfzQ







작가의 이전글 자신의 청중이 되어 보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