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노아 Apr 03. 2021

가장 소중한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다.


 이 녀석은 귀가 길고 털이 많고 얼굴은 사람처럼 생겼다. 게다가 감성도 풍부하고 자기가 인간인 줄 안다. 정해진 시간에 미용을 안 시키거나 목욕을 안 해주면 시무룩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녀석의 특징은 호기심 많고 새로운 것을 무척 좋아하는 것이다. 장 보고 오면 무엇을 사 왔는지 자기가 일일이 확인해야 하고 택배가 오면 마약 검사하듯 먼저 냄새 맡고 개봉해야 한다.(막으면 으르렁 화낸다) 그 호기심은 산책할 때도 영락없이 드러난다.  자주 간 곳엔 흥미가 없고 그런 곳엔 의자만 보면 앉는다. 새로운 곳에 가면 개처럼 달린다. 그때야 비로소 쟤가 개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녀석에게 흔해빠진 일상은 늘 심심하다. 항상 새로운 것, 특별한 것만 찾아다닌다. 나도 견공처럼 새로운 것만 좋아하며 산 적이 있었다.


 새로운 것 가장 좋은 것일까?

 



'띵~"


 못 보던 문자가 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돗물 공급 중단" 본능은 반사 행동을 시작했다. 가장 큰 들통에 물을 한가득 담았다. 샤워는 조금 일찍 하고 브런치는 나가 먹고 저녁은 중국음식 To go 하자. 흠, 이 정도면 충분하지? 화장실은? 물 없는 하루를 고민하자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럭저럭 그렇게 물 없이 잘 지냈다. 물 없는 하루 덕에 나는 이 도시 수돗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미국 수돗물은 석회가 많고 경수에 속한다, 바다 같은(남한 만한) 미시간 호는 10억 년 전 빙하의 붕괴로 만들어졌다, 인근 캐나다 국경과 인접한 휴런호는 미시간호와 서로 이어진 한 개의 호수다. 오대호 가운데 가장 큰 호수는 슈페리어호다."  오대호가 세계적 호수인 것은 알겠는데 그중 두 개 호수가 내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오호, 그 사실에 무척 고무되었다. 갑자기 수돗물이 존경스러워졌다. 흠, 10억 년 전에 생겼단 말이지...


 일상이 파괴된 물 없는 하루는 평소보다 길었다. 그 하루 동안 나는 물의 소중함 보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더 많이 느꼈다. 내가 글을 쓰는 4월 1일은 만우절인데 과거로 들어가(시차) 한국에 동생 하나 겨우 속여 먹었다. 오늘은 미국 친구에게 시도할 작정이다.


" 겁나게 웃기는 거짓말은 뭘까?"


 내 만우절의 일상은 거짓말을 해야 하고 생일의 일상은 이벤트를 해야 한다. 나는 이처럼 규칙적이고 평범한  일상을 좋아한다. 우리 조상에 칸트 피가 섞여 있는지 모르겠지만,


잠자리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식사를 하고 산책하는 등 모든 것이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졌다. 칸트가 잿빛 코트를 입고 스페인 지팡이를 손에 쥐고 집 밖으로 나오면, 이웃들은 정확히 3시 30분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도 그렇다. 아니 어쩌면 내가 매우 부지런하고 고지식할지도 모른다. 요즘 혈압약 끊고 운동은 물론이고 규칙적으로 내 혈압도 감시한다. 아마존에서 Fitness Tracker하나 장만했다.(은근히 효과적이다) 시간별로 혈압과 맥박이 휴대폰 앱에 저장된다. 120/80은 꿈도 안 꾸지만 140/90을 목표로 하는 나는 매일 그 수치의 근사치가 저장되는것을 본다. 혈압계로 다시 한번 확인하면 조금 더 높게 나오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치다. 매일 만보정도 꾸준히 걸었더니 몸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반가운 것은 내 좋은 습관이 내 일상이 되자 행복감도 찾아왔다. 노동과 운동은 다른 것 같다.  


   


 

 건강 말고 소중한 것 중 하나 더 고르라면 사랑이라고들 한다.


 가장 쉽게 경험하고 모두 해보는 에로스 사랑은 특별함으로 시작한다. 소개를 받거나 운명의 번개를 맞으면 우리는 마약 같은 사랑에 빠진다. 서로 멋진 옷을 입고 꽃단장하고 좋은 곳에서 만난다. 두 사람의 일상은 별로 마주치지 않는다. 만나는 순간마다 항상 특별하고 새로운 것만 만난다.

 둘은 사랑이 시키는 대로 몸을 나누고 동거를 하거나 결혼을 한다. 그때부터 둘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만난다. 서로의 모습도, 언어도, 행동도 더 이상 가꾸지 않는다. 사랑은 더 이상 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계약에 갇혀 있거나 헤어지는 일도 사랑의 몫이 아니라 사람의 몫이다. 용감한 현대 소년 소녀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만나고 갈라서지만 체면이 중요한 옛날 사람들은 어찌하든 참고 살았다. 부모 가운데 이혼을 결정한 사람은 독립투사만큼 용기가 필요했다. 역사는 그렇게 천천히 구른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사람이 죽어 나가야 새로운 문화는 일상이 된다. 나는 청춘남녀의 사랑이 끝나고 일상을 만나는 순간부터 참사랑이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평범한 일상이다.




 봄이 노크해서 평소처럼 여러 가지 정리를 시작했다. 오늘은 옷장 속의 계절도 바꾸기로 했다. 옷 정리를 하면서 Donation 할 옷을 골라 보았다. 오랫동안 입지 않아도 쓸만한 수준의 옷을 골라냈다. 청바지 종류가 많이 나오고 면바지도 몇 벌 골랐다. 미국은 유행이 늦어서 아직도 몸에 꼭 붙는 바지가 대세다. 펑퍼짐한 바지를 선발하고 몇 년 동안 가지고 다니기만 하는 옷도 골라냈다. 한아름 모아놓고 정말 줘도 되는지 하나씩 다시 검사했다. 아... 이런, 추억이 옷에서 꽃가루처럼 쏟아져 나온다. 머리가 좋은 건지 옷이 반항하는 것인지, 옷 하나 잡고 한참 멍하니 추억 꽃가루 때문에 눈을 감았다. 이 옷과 함께 한 특별한 기억, 평범한 일상들이 마구 뒤섞여 하나둘 기웃거린다. 좀 주저했다. 이 옷들을 내게서 떠나보낼 수 있을까? 아들에게 선물 받은 조금 작은 셔츠도 골랐다. 내 삶의 흔적이 옷감 촘촘한 실 사이에 다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당차게 마음먹고 아프지만 떠나보냈다. 언젠가 나도 세상에서 수명을 다하면 너처럼 나를 떠날 테니까, 너무 슬퍼 않기로 했다.




 글을 마무리 하려는데 갑자기 그녀 생각이 났다. 영화 그래비티 Gravity의 주인공 샌드라 블록이다. 영화 속 그녀는 사고로 우주미아가 되어 생사의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극적으로 혼자 살아남아 지구의 햄 ham(아마추어 무선인)과 무선교신을 한다. 삶의 가장 고독한 순간 죽음을 앞둔 그녀는 지구의 개 짖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 홀로 남은, 소리 없는 우주에서 가장 감동적인 소리가 바로 복슬강아지 소리였다. (아기소리도 들린다)  


일상의 소리, 일상의 사건, 평범한 하루,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현실이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인걸 이젠 분명히 알아버렸다.                        

 

         



    

          

작가의 이전글 이별루틴 routin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