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달리 시골에선 물방울 잡담 소리도 선명하게 들린다. 이번 비가 산불도 끄고 대선 열기도 식혀주고, 방역 우산 사라진 셀프 코로나 시대에 우리 메마른 마음도 촉촉이 적셔주어야 할 텐데.
나는 사실 가뭄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겨우 시골집 앞마당 잔디와 뒷마당 텃밭 정도 가꾸면서 사치스러운 비명 같지만 걱정은 항상 크기만 다르지 내용은 모두 똑같다.
남들보다 늦게 양파, 마늘의 겨울 외투인 부직포를 걷었다. 앙파 이파리가 왜 이제야 걷냐고 막 화를 낸다. 그 이파리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흙엔 검정 비닐을 덮어 두었는데도 처음 보는 잡초가 양파 몸에 딱 붙어 양파 키만큼 자랐다. "부직포 늦게 거두니 그 모양이지" 옆집에서 흉볼까 봐 만사 제치고 잡초부터 잡아 뜯었다.
한 무더기나 나왔다. 잡초제거가 시원할 줄 알았는데 웬걸, 마음만 아프다.
똑같은 생명의 지위를 가지고 같은 흙에서 같이 자란 양파와 달리 근본 없는 놈이라고 무시당하며 죽어가는 잡초.
어쩌면 나는 잡초같이 살기 싫어 공부를 열심히 했었나 보다.
어제는 우연히 윤동주를 읽었다.
문득, 잊더라도 청년의 시 몇 개를 외우고 싶었다. 시인의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문장의 서시를 다시 외웠다. 나라를 십자가로 등에 지고 고뇌하던 청년의 마음 같지야 않겠지만 어려서 숙제로 외울 때와 달리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스물넷의 앳된 그는 시를 발간하고 불과 사 년 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본에게 잡초처럼 뽑혀 옥사했다.
내가 뽑은 잡초는작년에 말라죽은 풀 찌꺼기와 낙엽을 태울 때 함께 태우기로 결정했다.
처음 사용해 보는 화덕 , 아마 전 주인이 소 키울 때 여물 끓여주던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불을 지폈다. 불쏘시개는 지난해 가지치기한 감나무 잔가지와 봄에 피어날 꽃나무 씨앗에 덮어 두었던 볏짚이다. 감나무를 감쌌던 곤충소와 막 죽어 아직 체온이 남아있는 잡초들까지 한꺼번에 불에 올렸다. 순식간에 불은 시뻘겋게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이승을 떠나는 영혼처럼 하얀 연기가 되어 연통에서 꽃처럼 피어오른다.
몇 해전 나는 애견 로이를 화장시키고 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나는 교통사고로 두 동강 난 녀석을 현장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생을 마치기 싫어 펄떡거리는 그의 시뻘건 심장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전장에서 포격으로 찢어진 부하를 끌어 안고 절규하던 지휘관과 겹쳤다. 언제나 생명은 기적같이 세상에 오고 기가 막히게 세상을 떠난다.
망각이 고통을 덮어주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화장장 뜨거운 불길에 들어가면, 화덕 너머 유리창에 비친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나 똑같이 아프다.
상실, 그때마다 나는 고통에서 도망치려 삶의 마지막을 냉소하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생명을 죽이는 것이 싫어졌다.
작년 여름 이 집에서 뱀을 죽이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며칠밤 잠 못 이루고, 난 녀석을 양지바른 앞마당에 묻어 주었다.
"아, 정말 그렇게 세게 쳐서 죽이지 말라고" "그럼 살살 쳐서 죽이나?"
난 크리스천인데, 족구 때문에 군에서 친하게 지내던 법사님은 내가 파리채 휘두를 때마다 늘 그렇게 나무랐다. 참 철도 없지, 난 겨우 이제야 그분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잡초들이 다 타들어 재가되고 생명의 화장을 마칠 무렵, 지난해 포클레인 기사가 담 구석에 모아둔 돌무더기에서 바닷가 작은 게 같은 것이 수십 마리 떼로 올라온다. 가까이 다가 보니 거미 새끼 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