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전 업무만 하고 운동삼아 아파트 안의 수영장을 찾았다. 수영장은 여느 호텔 실내수영장과 비슷하지만 언제든 혼자 조용히 수영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수영장 건너편 에는 피트니스센터가 있는데 그곳은 항상 북적거린다. 미국 냄새나는 복도에는 내가 좋아하는 간식 자판기가 있고 운동을 마치면 나는 항상 습관처럼 주전부리 하나를 뽑아 엘리베이터를 탄다. 여기는 나름 렌트가 비싼 곳이라 수영장 드나드는 사람 대부분은 옛날 미드 베이워치에 등장하는 백인 미녀들이 많고 난 중국인 같다.
오래전 대학 은사님을 뉴욕에서 만났다. 그분은 미국 박사가 귀한 시절 보란 듯이 오 년 만에 박사학위를 거머쥐고 한국 강단으로 복귀했고 강의실은 학생들로 초만원이었다. 다행히 그분 과목을 열심히 수강한 덕에 나를 유심히 지켜본 교수님과 나는 가까워졌고 그 친분은 미국까지 이어졌다.
"노아 그거 알아?
내가 유학 때 우리 학교 동양학생은 나 혼자 뿐이었어. 그런데 백인애들하고 단체사진 찍으면 항상 내가 하인처럼 보이는 건 뭐지? 의문의 일패?"
하하하 유쾌하게 그 당시 웃픈 이야기를 하고 웃지만 난 속으로 "키 작고 왜소한 교수님이라 그렇게 보였겠다"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난 미국에서 내가 교수님과 다르게 느껴질 줄 알았다. 난 키도 적당히 크고 얼굴도 하얘서 , 아니 전신이 우윳빛 갈 백지영이라서, 백 인애들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동남아 보듯 그들에게, 아니 스스로에게 무언의 인종차별을 받았다.
다행히 수영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전부 토네이도 워닝에 놀라 TV 앞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 홀로 자유형과 평형으로 알찬 수영을 즐겼다. 몇 번 왕복을 하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등 차가운 긴 의자에 잠시 누웠다. "그래 이거지 한 번씩 운동을 해야 머리도 맑아지는 거야." 오랜만에 잡생각과 골치 아픈 생각들이 떠나자 마음이 잡초 뽑고 Lawnmower로 바짝 자른 초록 잔디 같아졌다. 애드빌을 먹고 통증이 사라진 기분? 평온이 찾아왔다.
순간 "단순한 삶"이라는 영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Simplicity"는 어릴 적 리처드 포스터 교수를 통해 배웠다. 내가 유학할 때 그분은 우리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책으로만 알던 그는, 강의도 좋고 인물도 인품도 좋았다. 나는 내 전공 옆동네 지만 일부러 그분 과목을 들었다. 그분과 함께 하던 시간은 내 인생 추억 1%에 들만큼 좋았다. 그때 입었던 값싼 붉은체크무니 남방은 매년 버려지는 수많은 옷들 가운데서 늘 살아남았다. 지금도 수십 년 가보처럼, 연예인과 악수하고 손 안 씻었다는 말처럼, 그렇게 옷장 한가운데 알만한 사람만 안다는 내 유일한 명품 "Armani"와 함께 걸려 있다.
나는 그때 자기 내면과 삶이 단순해야 한다고 배웠다.
저자와 함께 삶을 나누어 보니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수많은 작가들과 달랐다. 내게 보이는 그는 겸손하고 검소했다. 그는 자기 책의 내용처럼 살고 있었다. 그는 식사 도중 내가 요청한 타인에 대한 비평에 대해 즉답 대신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라고 에둘려 말했다. 그때 나는 타인의 약점이 눈에 잘 보이는, 귀신처럼 자폐아처럼 , 내 육감 레이더를 무기로 장착하고 살았다. (그것은 어머니 유전자 M52-3이다)
나는 단순한 삶이 청빈에 관여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때부터 나의 미국 생활은 근검해졌다. 물론 유학 중에 돈을 아껴 써야 하는 것은 기본의 기본이지만 없어서 그렇기보다, 자발적이고 정신적인 결단이었다.
그 단순한 삶의 철학은 해묵은 물건처럼 시간이 가면서 낡고 달았다.
세월이 흘러 생활 형편이 좋아지자 "좋은 물건은 비싼 물건"이라는 질 낮은 생각에 오염되었고 누군가 명품을 선물하면 그를 오랫동안 잘 챙겨주었다.
나는 고상한 척했지만 내면은 속물이었다.
혼자뿐이던 수영장에 물개 같이, 배우 같이 늘씬한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눈이 큰 인도 여자였다. 별로 그 나라에 관심은 없지만 인도 출신 작가 줌파 라히리 때문에 인도 여자들에겐 잠재적 호의가 있었다. 나는 실눈을 뜨고 그녀를 빠르게 검색하고 있었다. 그녀는 준비운동 없이 물에 뛰어들었다.
그녀의 시작은 자유형에서 평형 배형까지 물귀신처럼,아니 물개였다. 영법도 돈 주고 배운 듯 고급질 뿐 아니라 힘 있고 건강해서 아름다웠다. 나는 여자를 몰래 구경하다 실눈을 포기하고 눈을 크게 뜨고 앉아 그녀를 봤다. 그녀는 짧고 굵은 수영을 마치자 내시선과 조우했다. 나는 구경하던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미소를 띠고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중국인에게 말없이 예쁘게 웃어주고 나갔다.
" 그래 수영은 저렇게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해야 해"
나는 항상 운동할 때 잘하려고 생각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나도 한 번 더 돌고 그녀처럼 격렬하게 물살을 헤치고 나가자.
" Excuse me"
정신없이 헤엄치느라 물속에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언뜻 소리와 함께 보인 것이 물속에 있는 다리였다. 다리는 가늘고 오래된 나뭇가지 같은 하얀 백발노인의 것이었다. 자기가 몸이 안 좋으니 주의해서 수영해 달라고 예의 바르게 부탁했다. 칠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녀는 무릎관절을 위해 운동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곧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가 미안한 얼굴로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난 서양인의 머리에 박힌, 일본이 잘 사는 나라라는 생각이 참 싫었다. 골프장에서도 앞팀 노인들에게 좀 빠르게 진행할 것을 부탁하면 그들은 어김없이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일본 말고 어딘것 같냐고 되물었다.
그녀는 물속에서 난간을 잡고 곰곰이 생각했다.
"흠, 우리 손녀가 BTS 좋아해, 너 혹시 코리아?"
나는 아까 인도 여자에게 하던 것처럼 엄지 손가락을 들고 미소로 대답했다.
인간은 생각이나 몸이나 단순한 걸음마로 시작해 단순한 걸음마로 생을 마친다는 생각이, 자판기 snikers'초코바를 질겅질겅 씹으며, 머릿속 깊이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