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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노아 Sep 11. 2022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Hope Gap

 글이 나무에 찍혀 제대로 익어 명작이라 불리려면 아마 백 년쯤 걸릴지 모른다.


 그런데 영화는 좀 다른 것 같다.  "노량"과 "한산"을 보면 기술의 괄목할 성장이 상상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일에 빠르게 익숙해져 이전보다 표현이 세련되었다. 하지만 책에는 CG가 없고 독자의 상상만 다.


 그래서 나는 화려한  영상에 매몰되지 않도록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한국 추석에 무임승차해 분위기를 느껴보려고 (여기 추수감사절은 아직 한참 남았다)  며칠간 영화 한편씩 보며 놀기로 작정했다. 책 같은 영화, 거기에 호감형 여우 아네트 배닝 때문에 이 옛날 영화를 선택했다.    

 영화 초반에 원제목 <Hope Gap>을 그대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이란 제목에도 강한 끌림이 왔다. 사실 영화 보기 전 같은 주제를 생각하던 것이 있어서 또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비슷한 주제는, 최근에 읽은 로맹 가리의 <유럽의 교육>에서 느낀 내 생각, "우리가 살면서 믿는 것 대부분 왜곡과 거짓을 품어서, 마시는 공기처럼, 그렇게 세상이 산소로만 순수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 이야기 주인공 야네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전설의 지도자, 독일군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레지스탕스 내부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데이다 라는 지도자를 찾으려고 애쓰지만 사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임을 나중에 알게 된다. 종교나 희망 사랑 등의 추상적 가치에는 믿음이라는 촉매가 작용해 허구를 쉽게 실상으로 바꾼다.


사랑 또한 인류의 가치로 의미가 있는지 아니면 허구 인지, 한동안 깊은 생각에 몰입해 있었다.  


       

1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그 사이에 틈 Gap이 많이 있음은 결혼이란 제도적 장치에 있어본 누구나 모두 아는 사실이다. 주인공 부부 그레이스(아네트 베닝)와 에드워드(빌 나이)는 그 균열을 안고 29년을 부부로 살았다. 그 갭 Gap은 여전히 앞으로도 서로 닮아가고, 같아질 수 있다는 희망의 갭 일수도 있고 영원히 서로 해결하지 못할 난제의 갭 일수도 있었다.


 사실 결혼은 상대가 지나치게 미숙하거나 독특한 성향을 가진 경우 올무와 같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탈출하려고 몸부림 치면 칠수록 올무는 조여 오고 몸과 마음은 피투성이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심한 손해를 감수하고서 라도 벗어나야 할지, 혹은 참고 남은 인생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저항하지 말고, 아프지 않게 살아야 할지 많은 부부는 추석 같은 명절에 고민하게 된다.


 그레이스는 시를 편집하는 직업을 가진 현실적이고 스마트한 여자다. 

 그녀는 거칠고 직선적이지만 내면에 남편 에드워드를 사랑하고 그와 진정한 교감을 나누고 싶어다.  그러나 부부소통의 불통에는 다수 한국 남자도 보유한 영국 남자의 무심함이 한몫한다.  


 남편 에드워드는 역사교사이며 위키피디아를 편집하는 직업을 가진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이다.

 그가 생각하는 무심의 원인은 자기가 아니라 그레이스 때문이다. 그가 집을 떠나는 분명한 이유도 사랑을 구실로 하지만 안젤라라는 여인이 제공한 탈출구 때문이다. 에디의 진술에 의하면 그가 사랑하게 된 안젤라는 아내와는 전혀 다른 성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주는, 성품이 있어서라고 말한다.


기가 센 여자들, 자기 마음대로 주변과 세상을 주무르고 혹시 운이 좋아 아버지의 권력이나 부 혹은 재능이 태생적으로 주어졌다면 안하무인으로 사는 여인들이 세상에  참 많다는 생각을 했다. 에드워드는 평생을 의기소침하게 살아온 거다. 그리고 그의 이별 결심은 안젤라에 대한 사랑보다 그녀가 열어준 길 어쩌면 Hope Gap을 발견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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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극도로 당황한다.


아무리 철의 여인이라 할지라도, 지성이 충만하고 단단한 내면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거의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가 떠난다는 말은 충격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삶은 비틀거린다. 의지할 사람은 아들뿐, 아들의 사생활과  연애까지 깊숙하게 간섭하고 지배하던 그녀는 아버지와 자기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 존재하는 피붙이에게 나약하게 쓰러져 기댄다. 그녀는 이번 사건의 원인제공자로서 가해자이며 또한 동시에 피해자다.

 

그레이스는 아름다운 절벽, 호프 갭을 걷는다. 바다는 넘실거리고 위기의 돌파구처럼 보이는 죽음도 유혹한다. 남편을 거칠게 대하고 성당에서 회개한 후 그를 안을 때만 해도 다툼은 사사로운 삶의 일부인 줄 알았다.  남자는 항상 건강하고 가슴도 넓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그것은 허구다. 남자도 상처받고 울며 때로는 패배의 책임으로 세상을 등지고 싶은 경우가 여자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른다.


 그레이스는 이 파국을 처음 제자리로 돌리고 싶어 한다. 그라운드 제로에 들어 서면 해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걷는 호프 갭은 희망과 파괴가 공존하는, 아름답고 잔인한 인류의 자궁 , 바다를 품는다.


 그녀는 남편이 살고 있는 안젤라의 집을 찾아간다. 남편 에디는 자주 혼자 사는 아들을 동경했었다. 그는 안젤라의 거처에서 자기다움으로 가득한 평화, 호프 갭의 잔잔한 바다 같은, 고요를 즐긴다.

이것이 화해를 위한 그녀다운 시도였을까? 그녀는 무단으로 침입해 에디와 안젤라의 공간을 허리케인 같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침탈한다. 비난하고 항변하고 피해자로서 권리를 주장한다. 그리고 결국 이 사단의 또 다른 원인 제공자 안젤라를 만난다. ( 왜, 여자들은 바람피운 남편을 잡으려고 상대 여자를 찾을 때  "그년이 나보다 얼굴이 이뻐, 학력이 좋아, 하!, 어디서 거지 같은 걸 보고 좋다고" 극 중 안젤라는 그레이스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분명한 한마디 " 그동안 불행했던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두 사람은 행복하고 불행한 한 사람만 남았다"는 말의 철퇴를 맞고 문을 박차며 돌아선다.


 그레이스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남편 에디의 말처럼 그저 우연히 잘못된 기차를 탄 것일까?

 그녀는 남편 이름 에디라 명명한 반려견을 키우며 정상을 찾으려고 명랑한 척 애쓰지만 법적인 이혼을 진행하 살아서 하는 생이별은 죽음보다 아프다.        


1/2


 에드워드는 이 헤어짐을 평생 준비하고 있었다. 

 아들 제이미(조시 오코너)를 아내 모르게 호출해 의논 아닌 통보를 하고 실행하면 될 줄 알았다. 이혼이 사랑하는 아들의 가슴에 상처가 될 것임은 짐작하지만 자신에게 남은 삶의 구속은 아들의 상처보다 더 큰 자유의 문제였다.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든, 사랑하든, 존경하든, 동기가 사라지면 무심해진다.

 관심을 받던 사람도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는 애초에 만남이, 자신에게 용기를 주었던 아내에 대한 처음 감동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내내 에디의 침묵과 무심한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나는 말없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거나 타인에게 무관심해서(무시하거나) 그런 것이라 생각해서다.


2  


영화를 다 보고 주제를 붙잡아 보려고 애를 쓰며 잠들지 못했다.

우선 선명한 주제 사랑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고도의 예민한 성질을 함유한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허상이 아닐까?   단지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처음 사랑의 감흥이 유효기간을 지나지 않을 동안 느끼는,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옯겨지지 않는 한 무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갇혀 있지 않다면, 그저 호프 갭을 걸으며 "우리 안에 자기"로 혼자 성숙해지는 것도...  


글을 좀 잘 쓰고 싶었는데, 급하게 마감할 일이 생겨서, 또 그만 정리하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시가 좋아서 남긴다.   


<어느 아일랜드 비행사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다 An Irish Airman Foresees His Death>  

 

저 위 구름 속 어디에선가

최후를 마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

내가 싸우는 상대를 증오하지 않으며

내가 지키는 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내 고향은 킬타탄 크로스

내 동포는 킬타탄의 가난한 이들.

내 죽음이 그들에게 상실감을 가져다줄 것 같지도 않고

전 보다 그들을 더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지도 않다.

어떠한 법이나 의무감도 고관대작이나 환호하는 군중도

내게 싸우라고 시킨 일은 없었다.


어떤 외로운 환희의 충동이

구름 속의 이 소음으로 몰아넣었다.

모든 것을 따져보고 생각해보았다.

앞으로 올 세월은 호흡의 낭비,

지난 세월 또한 호흡의 낭비처럼 보였을 뿐.


이 삶, 이 죽음과 견주어볼 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 아일랜드 출생, 시인



섬광


예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인지는 알 수 없지요.

문 뒤편에 있는 그 풀밭을 알고 있어요,

달콤하게 코를 찌르는 향기, 한숨 소리와 바닷가를 비추던 그 불빛들도.

예전에 당신은 제 사람이었어요.

얼마나 오래 전인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제비가 날아오르던 그 순간

당신은 그렇게 고개를 돌렸고

베일이 벗겨졌지요, 난 예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요.

예전에도 이랬었나요?

이렇듯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흐름이

우리의 삶, 우리의 사랑과 더불어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다시 회복되고

밤낮으로 다시 한번 기쁨을 주지는 않을까요?



Sudden Light

- Dante Gabriel Rossetti


I have been here before,

But when or how I cannot tell:

I know the grass beyond the door,

The sweet keen smell,

The sighing sound, the lights around the shore.

You have been mine before,

How long ago I may not know:

But just when at that swallow’s soar

Your neck turned so,

Some veil did fall, - I knew it all of yore.

Has this been thus before?

And shall not thus time’s eddying flight

Still with our lives our love restore

In death’s despite,

And day and night yield one delight once more?

- 세계문학 영미문학 시선집, <축복받은 처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시선>(글과 글 사이, 김천봉 역, 2017)


https://youtu.be/0K5e_toSN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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