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노아 Oct 10. 2022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비로소 사람으로 살아갈까

 미국 이민 초기에는 미국 욕이 실감 나게 마음까지 꽂히지 않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나는 각 단어의 뉘앙스를 느낌으로 이해하고 습득하여 미국 욕에 무게를 느끼며 감정에도 손상을 입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단어도 그랬다.

이 나라에서  사용하는 Love는 문장에 따라 다양한 곳에서 다른 느낌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그 단어를 사용할 때 경우에 따라 각각 느낌이 다르다. 한국에서 사랑한다는 손가락 표현, 이성에게 느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해 본 적이 없던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차라리 "좋아한다"가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 "Love"는 때에 따라 사용하기가 참 편리하다.


 그 사랑에 대해서,


아가페 에로스, 필레오 말고 스캇 펙이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신주 모시듯 아끼고 강조한 그 단어( 삶의 비밀)에 (나 역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그 단어가 마음에 쑥 와서 닿았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요즘 너무 바빠 글을 조금도 두드리기 힘든 상황을 맞이하자, 슬슬 브런치 애독자 (그래 봤자 몇 안 되는) 걱정이 들었다. 살아있음을 신고해야지 하는 결심뿐,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이 지점에서 성경 저자들이 그랬다는 자동으로 글이 써지던 과거와 자판 앞에 멍 때리는 현실을 동시에 경험했다.


그날도 새벽에 글을 쓰려고 -나는 새벽에 일어나면 나만의 여러 가지 루틴이 있다- 신과의 만남, 날씨, fOX뉴스, ASMR, 클래식 음악 등을 순서대로 접 하는데 우연히 지난 한국 tv 프로그램 중에 <미스터리 듀엣>이란 예능에 발 접질려 빠져 버렸다.  내용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인(주로 가수들)을 제작자의 노력으로 누군지 모르게 만나서 벽을 가리고 듀엣을 부르다 막이 걷히고 울며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그렇게 소식을 끊고 지냈다면 "저거 쑈 아냐?" 하는 의심이 생겼지만 그냥 무시하고 오랜만에 발현한 찐 감성에 잠시 집중했다) 다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출연한다면 누구와 노래를 부를까? 손가락을 꼽아 보아도 선뜻 생각이 나질 않는다. 물론 나와 음악 동지이자 여전히 연락을 유지하는 선배 한 명은 있지만 감동이 없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과거의 친구들, 사람들과 등을 지고 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같은 하늘이 아니라서 생긴 일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내가 요즘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분명 언제부턴가 사람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물론 최근에 인간관계에서 실패한 경험이 한몫한 것은 틀림없지만 가장 선명한 사실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타인에게 거짓으로 응대한다는 것이 인간을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 자신도 그 속에 들어있을 테고)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원인은 내가 한국을 들락거리면서 시작되었다.


내가 경험한 미국 사람들 대부분은 단순한 편이고 솔직한 편이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서양은 정찰제 고 동양은 에누리가 있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 흥정하고 기싸움을 잘해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관계도 그런 맥락에서 비슷한 듯 하다 . 나는 한국을 어른으로 와서 다시 체험하다가 심한 이질감을 느꼈다. 관계의 이중성이랄까, 물론 어려서 철없이 경험한 관계와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종합하면 이중성이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점점 혼자가 되어가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




 제작자의 교묘한 의도로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한국 예능프로에서 내가 잠시 눈물을 보인 것은 몇몇 출연자의 진정성을 느껴서 거나 그가 연기를 잘해서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나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본능으로 자식사랑이나 연인 사랑 말고)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나는 깨달음에 관해서는 생각이 많았다. 종교적인 각성(거듭남)부터 삶에 대한 통찰까지 그 여정은 길고 계속되었다. 그런데 사랑- 스캇 펙이 지적한- 그 사랑만큼은 삶의 재료로서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누군가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공허한 일이라는 생각도 잠시 하게 되었다.


작년에 그러니까 얼마 있으면 다시 방문할 한국 시골집에서 우리 집을 찾아온 길냥이에게 사료를 사서 먹였다. 하루 두 번씩 때론 내가 가끔 먹던 귀한 고기까지 잘라 구워서 나눠먹였다. 추울 때는 냥이 전용 연어 통조림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후후 불어서 먹인 적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냥이들은 곁을 주지 않았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 애들을 챙겼다. 절친 선배 말처럼 전생에 인연이거나 내 천성에 연민이 많은 건지 모르지만 그때 나는 생명 가진 것들(식물을 포함해)을 보살필 때 행복했다.


그와 반대로 내 아이들에게는 때로 엄격하고 냉정했다. 나의 별난 이중성은 나 자신에게 타인에게도 헷갈렸다. 나의 한 부분, 따뜻함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되는 것 같다. 나의 따뜻함은 어쩌면 타인에게 호구로 보였거나 친절을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 여행은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이 더 많았다. <자기 사용설명서>를 이제야 온전히 번역했으니 말이다.  


각설하고, 어렵겠지만 이제부터 나는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인간이 되려고 쑥과 마늘만 먹고 곰처럼 살았는데

이제 이 행성의 남은 시간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보려고 한다.  


   https://youtu.be/ZZ5vlVinvEA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