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을 방문한 도시녀와 도시 강아지를 기쁘게 해 줄 방법을 고민하다가 호수와 산이 맞닿아있는 명소를 발견했다.
도시에서 온 여동생의 방문은 항상 고맙다. 우수한 택배와 자전거 장보기로 먹거리를 해결하지만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 자연농 텃밭의 수확으로는 내 혀의 미각을 자극할 동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미식가 그녀는 만드는 일보다 먹는 일과 맛의 평가에 특화된 심사위원이다. 그러다 보니 손님을 위한 내 요리는 천박한 머슴의 행태를 벗어나 나도 모르게 이름만 들어 아는 흑백요리사가 된다. 게다가 그녀는 페스코 베지테리안이라 고기로만 살아온 서양인 같은 나의 입맛과는 동행이 늘 어려웠다.
그곳을 선정한 데는 주변 두부 맛집이 한몫을 했다. 요즘 니어링 부부의 책에 한껏 빠져있는 그녀를 만족시킬 소박한 밥상과 산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요리의 경계를 넘어 남의 요리를 맛본다는 것은 미각 여행이라는 측면에서도 자극적이며 긍정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아뿔싸 우리는 트레일 주차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브런치 베이커리 카페마저 발견하고 말았다.
먹으러 가는 건지 산행을 하려는 건지 이미 내 배낭에는 개는 싫어하고 사람만, 그것도 자기 맘에 드는 사람만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강아지 루이의 간식과 물 그리고 우리 커피, 과일 등으로 가득 차 있을 뿐 아니라 적당한 추위에 맟설 방한장비마저 챙겨 마치 안나푸르나 제1봉을 정복할 원정대처럼 보였다.
브런치 카페는 우리의 시간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시골답지 않은 분위기에 그럴싸한 유기농 빵과 수프까지, 애견동반을 허락받아 편안하게 따뜻한 온기와 향긋한 음악을 먹으며 혀끝에 스치는 미각을 즐겼다.
" 이렇게 놀아도 괜찮아?"
출발시간이 다소 늦어지자 걱정하는 동생에게 나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두세 시간이면 한 바퀴 돌텐데 뭘, 동네뒷산이잖아. "
정말 그랬다. 동네 아저씨 같은, 교회오빠 같은, 산은 높지 않지만 여기저기 푸름을 간직한 곳이었다. 나무 위 하얀 망토를 걸친 설경과 푸른 호수물에 철새까지 북적대는 광경은 뇌가 잠시 멈춰서 저장을 해야 했다. 물론 오레곤주의 크레이터 호수만큼은 못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곳을 보게 될 줄이야, 우리나라 산하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 같았다. (물론 처음은 항상 신비롭고 사람마다 감흥이 다르겠지만)
산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루이가 지뢰를 탐지하며 앞서 나가고 동생은 탐지견 핸들러 아니 똥 치우는 아줌마, 나는 지휘관 아니 말단 사병이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공원을 산책하듯 가뿐하게 밀고 나갔다.
가벼운 언덕길과 상쾌한 겨울공기, 철새들의 재잘거림은 산행의 축복이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고 이렇게 한 바퀴 돌아 예약한 두부집에서 점저를 먹으면 되는 천국의 하루였다.
호수의 절반가량을 지나자 큰 주차장이 나타났다. 저 멀리 아파트 숲도 군산공항에 착륙하려는 미군 f16전투기도 지나간다. 이제 온만큼 가면 되겠지 하는 생각과 약간의 피로가 다리에 걸리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나를 지배하던 여행의 기준은 오만과 교만이었다.
학창 시절 지리산 종주를 떠날 때도 어머니가 오만과 교만을 가득 담은 내 배낭에 몰래 개떡을 넣어주지 않았더라면, 야영지에서 쌀을 도둑맞고 흐물흐물 걷다 친구들과 산에서 아사했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항상 모르는 미래에게 교만했다.
반환점을 돌자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고 가던 길로 좀 더 빠르게 걸어 주차장이 있는 원점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웬걸 가도 가도 숲 속이다. 호수 주변 트레일이 꼬불꼬불해서 더 멀어 보이기도 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지쳐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 혹시 저쪽 주차장 입구가 얼마나 되나요?"
반대에서 오는 반가운 등산객을 만나 물었다.
" 좀 먼데, 부지런히 가셔야 해요. 갈래길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녀의 대답은 불안을 선물했고 아니나 다를까 갈래길이 나왔는데 우리는 빨라 보이는 산 쪽을 택했다. 그것은 내 판단이었고 동생은 물가로 가자고 했다. 내 판단이 틀린 것 같았다. 산은 깊어지고 길은 희미해졌다. 게다가 멧돼지가 파놓은 구덩이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어둠도 저 멀리서 출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내가 얻은 어두운 정보를 팀원에게 말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 이것 봐, 멧돼지 흔적이야."
동생은 패닉에 빠져버렸다. 이 녀석은 원래 겁이 많아 미국에 놀러 왔을 때도 숲을 지나다 뱀을 보고 냅다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다. 미국뱀이 어떻게 한국어를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ㅎ 놈은 순식간에 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치킨이다.
" 우리 뛰어가면 안 돼?"
미친. 그녀는 지휘사병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먼저 뛰기 시작했다. 개도 뛰고 나도 뛰었다.
헉헉, 시간이 가도 길은 나오지 않고 숲 속 언덕을 미끄러지며 뛰어내렸다.
" 헉헉 거봐 내가 수변길로 가자했잖아?"
동생이 은근 역정을 낸다.
" 헉헉, 이게 맞다니까. 내가 지리산 종주도 하고..."
" 아, 그 얘긴 그만해, 평생 아부지처럼 ..."
동생이 대놓고 역정을 낸다.
리더는 결과가 생명이다. 일이 꼬이니 아랫것이 덤빈다. 피그말리온이 가스라이팅이라고 말한다.
문제가 풀리지 않자 나는 오만과 교만의 갑옷을 벗어던졌다.
" 우리 아래로 내려갈까? 내 길이 맞기는 할 텐데 혹시..."
" 그러게 첨부터 아래로 갔어야지!"
겁쟁이 그녀는 어둠이 남파하자 이젠 화도 안 낸다.
우리 강아지는 진짜 잘 뛴다. 멧돼지에게 쫓겨 도망가듯 달린다. 재도 겁이 많고 개엄마 말을 잘 알아듣는다. 사람개의 특징이다. 무서운 게다. 그래도 이 상황이 웃긴다.
우리 모두는 겁에 질려버렸다. 그것은 어둠이 암막커튼을 치며 가게 문 닫을 시간이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치킨 그녀는 밤눈이 어둡다. 주차장에서 불빛이 많은 도로까지 나가려면 장님에게 핸들을 맡기는 격이다. 게다가 나는 보험커버 안되면 남의 차 운전 안 하는 완벽주의 불치병이 있다.
다행히 길은 찾은 것 같지만 원점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오리무중이었다.
우리는 정말 당황했다. 이대로 가다간 산에서 구조요청을 해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 헉헉 얼마나 가야 해?"
" 헉헉 나도 몰라 "
낙조가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 그러게, 빵집에서 일찍 나와야지, 실실 쪼개며 자연을 우습게 보더니. 아는척하지 말지, 잘난 척하더니."
어둠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 주면 끝이 나올 것 같은데...
앞에서 사람소리가 들렸다. 개소리도.
아, 사람이다. 커다란 레트리버, 예쁜 아줌마. 잘생긴 아저씨, 부자 같다.
" 저기 주차장 입구가 얼마나 남았나요? "
" 아네,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가시면 돼요"
" 감사합니다. 헉헉"
" 조그만 애가 잘 뛰네요"
" 네 코카스파니엘 이 사냥개라고 하더라고요"
헤어졌다. 부자 같은 사람은 친절하다.
웃기시네. 멍청이.
드디어 도착했다.
우리는 웃었다. 개도 웃는다.
나는 겸손해졌다.
미래는 모르는 것이 재밌더라.
고난은 이겨 먹어야 맛이고.
겸손해지자 명찰에 이름 박듯 마음에 교훈이 드르륵 새겨진다.
청암산 둘레길 군산호수는 새뜻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명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