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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나 May 03. 2023

넷째 날

고봉산 다른 길

산이 가까운 곳에 산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축복이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다양한 누리길이 있다.

선글라스를 끼고 배낭을 메고 촘촘히 걷다 보면 어느덧 누리길을 올라갈 수 있는 입구에 도착한다.


이 날은 매번 가던 아파트 중간길이 아닌 습지공원의 산책로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길

사람들이 많이 걷지 않는 길이 좋다.

아니, 사람들이 많이 다녔어도 내가 걸어가는 길에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다.


어느 순간부터 모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항상 가던 길을 가고 먹어본 음식만 먹고, 만나는 사람들만 만났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성격이 바뀐 거라고만 생각했다.


원래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흔히 검사를 해보는 MBTI는 INFJ가 나왔다.

그 이야기를 작년 동료들에게 하니 거짓말이라고 했다.

당신은 무조건 'E'여야만 한다고. 


그랬던 것 같다.

예전의 내 모습이라면 무대 위에 오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했다.

그랬었구나.


여전히 사람이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으니 계단이 보인다.

산이 좋은 이유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분명 이제는 올라가야 하는 길이 맞는데 내려간다.

알 수 없는 인생길처럼.


신나게 올라가다 보니 토끼 한 마리가 보인다.

우리 행복이는 토끼띠인데.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토끼띠.

안녕, 토끼.

성질 더럽다고 소문난 토끼.

생긴 건 정말 예쁜데. 

고봉산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전망대는 처음 가본다.

이곳이 정상이던가.

미세먼지가 가득했지만 사진 속 하늘은 거짓처럼 파랗고 예쁘다.

구름도 몽글몽글 피어나고 저 멀리 건물들도 보인다.

이 동네에서 건물까지 보이면 정말 날이 맑은 거라고 했는데 미세먼지에 속은 맑은 하늘.

다른 방향에 서서 보는 도시는 또 다르다.

과연 같은 곳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한쪽은 높디높은 건물들이 빽빽하고, 다른 한쪽은 밭이 펼쳐져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곳은 한쪽으로만 치우쳐 살아가기에는 조금 힘에 부친다.

내가 갖고 있는 신념을 직업전선에 놓였을 때 잠시 내려놔야 할 때가 온다.


잠시 커피 한 잔 마시고 쉬기로 했다.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자연보호에도 앞장서는 사람들이다.

일회용을 되도록 금지하고 텀블러를 사용하자고 권한다. 

믹스커피를 따뜻하게 태워서 넣은 보온병 작은 것 하나, 물을 가득 채운 500ml 텀블러 하나.

30리터 등산가방 안에는 달랑 이것들만 들어 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까치 두 마리가 집을 짓고 있다.

한 녀석은 나뭇가지를 구해다 주고 한 녀석은 촘촘히 집을 짠다. 

얼기설기 잘도 엮는다.


내려오는 길에 개나리를 보았다.

이제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꽃들.

겨울이 다 가고 봄이 살짝 왔다가 이제 여름이 오려고 한다.


빨리 산에 오르고 싶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산을 못 간지 한 달째. 조만간 다시 이 길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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