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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나 Mar 07. 2024

갑자기 나타난 존재들

길상효-깊은 밤 필통 안에서, 김혜진-가느다란 마법사와 아주 착한 타파하

동화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의인화 동화가 꽤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많은 동화 속에서 동물들끼리 사람처럼 대화를 하고 사람들의 개입은 별로 없었다.

요즘 나오는 동화들은 꽤 다양하게 등장한다. 고양이가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알려주거나(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오이가 사람들을 왕처럼 군림(오이대왕) 하기도 한다.


이번에 읽은 동화들은 문구류가 사람처럼 말을 하고 움직인다. 워낙 문구에는 진심인 사람이라 이런 동화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길상효작가의 <깊은 밤 필통 안에서>라는 작품은 비룡소문학상 수상작이다. 작가는 한국과학문학상을 타기도 했고 최근에 읽은 <나라는 우주>에서도 작품을 발표했다. SF관련 동화를 재미있게 잘 쓰는 듯하다.


동화집의 표제작 '깊은 밤 필통 안에서'는 학교로 달려가는 담이의 책가방 속에서는 필통이 널뛰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로 부딪치며 이리저리 들이받는다. 필통 속에서 담소를 나누는 연필들이라니. 발상이 너무 귀엽다.

돌고래 연필, 물방울 연필, 딸기 연필 등등 연필에 그려진 그림으로 이름이 불린다. 필통을 나가며 다시 돌아오지 못한 연필 친구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연필들의 이야기는 자신이 써 내려간 글에 대한 것이다. 일기를 쓰는 것은 사람이지만, 실제적으로 쓰이는 것은 연필이니 자신이 쓴 일기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구술한다. 그림도 그리고, 일기도 쓰고, 수학문제도 푸는 연필들.

담이가 필통 속 연필을 모두 꺼내어 서우라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자 연필들은 긴장하면서 궁금해한다.


연필마다 연필심이 달라서 쓰는 느낌도 달랐어요. 글씨모양도 조금씩 달랐고요. 읽는 사람은 몰라도 쓰는 사람은 알 수 있었어요.


편지를 쓰는 담이의 마음처럼 편지를 써 내려간 무지개 연필도 두근거린다. 연필들이 무지개 연필에 기대자 모두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을 한다. 정말 독특하다.

연필이 서로 기대어 서로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연필들도 감정이 있지 않을까?


'뭐라도 써봤으면'은 담이의 필통 속에 새로운 연필이 들어온 이야기다. 바로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연필. 잘난척하던 새 연필은 얼룩덜룩해진 채로 나갔다 들어온다. 담이의 친구들이 다들 새 연필을 신기해하며 만져보고 새 연필을 화를 낸다. 하지만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글씨를 쓰지 않고 담이는 아껴둔다.

연필들은 어떤 글을 쓰느냐에 따라 똑똑해지기도 한다. 신문에 밑줄 친 부분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지막 이야기 '걱정할 게 뭐 있어'는 지우개 이야기다. 원래 담이 필통에 살던 지우개가 아니라 다른 지우개로 바뀌면서 필통 속 연필들은 곤욕을 치른다. 곱셈을 못하는 딸기연필에게 면박을 주고 동시 문제를 푸는 당근 연필이 쓴 글씨를 지우다 문제집이 찢어진다. 다시 지우개가 되돌아오고 필통 속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너무 귀여웠던 동화.




다음 작품은 김혜진 작가의 <가느다란 마법사와 아주 착한 타파하>. 작가의 대표작인 <아로와 완전한 세계>를 처음 읽고 우리나라의 해리포터 이야기를 보는 줄 알았다. 이런 대작을 왜 몰랐을까?

이번 책은 우리 아이들이 독서클럽에서 읽었던 책인데 뒤늦게 작가명을 보고 읽기 시작했다.

2023년 여름에 나온 따끈따끈 이 동화 역시 환상의 세계로 나를 이끈다.


길을 잃으면 길을 안 잃었을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이 작가의 동화는 단순히 신기하다, 환상적이다, 멋지다로 끝나지 않는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틈에서 발견한 생각을 아이들에게 알려준다. 굳이 주류가 아니더라도 잠깐 비켜 있더라도 괜찮다고 토닥여준다. 길을 잘 잃어버리는 가느다란 마법사에게 앞을 잘 보고 다니라며 도토리 세 알을 건네는 교장 선생님도 따스하다.



'가느다란 마법사'가 '가느다라마바사'로 들리는 마법. 제대로 듣지 못하는 참새를 보니 반가웠다.

마법사는 어떤 마법을 써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선생님의 말을 떠올린다. '빈틈'을 찾으라는 둘째 선생님의 말을 떠올리고 마법사는 나무의 구석구석을 살핀다. 나무에 누군가 무언가를 붓고 갔다.


소망은 냄새도 소리도 빛깔도 없지만 심장처럼 두근거린다. 모양은 여러 가지여서 바람처럼 불거나 돌처럼 단단하거나 물처럼 흐를 수도 있다. 주전자에 담아 부었다는 걸 보니 물과 같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나무가 자라기를 바라며 소망을 부었다.

쓰레기처럼 보이는 먼지뭉치는 버려진 조각들이 뭉쳐져 어쩌나 힘을 가지게 된 존재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마법사는 이 먼지뭉치를 좋아한다. 작고 가느다란 것으로 이루어져서 말이다.


이 동화에서 종이가 길을 안내한다. 바스락대고 파삭 구겨진다.

종이가 가르쳐 준길은 지름길이었다. 종이 위에 일그러진 글자가 나타나면 마법사는 종이를 쥐고 귀퉁이만 펼친다. 종이는 흙이 묻었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경고도 하며 장 볼 목록을 바꾸기도 한다.

발상이 너무 재미있다.

필통 안에서 연필들이 수동적으로 기다렸다면 이 동화에서 종이의 의인화는 꽤 능동적이다.



봄을 기다리지 않는 서리가 나타나 마법사를 괴롭힌다. 마법사의 주문도 흔히 보이던 수리수리 마수리 같은 주문이 아니다.


비추어라, 넘쳐라, 받은 것을 품고 또 돌려주어라, 반짝이는 것들이여!


햇살이 가득해진 마당에 서리는 물이 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정말 사라진 게 아니다.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종이가 알려주는데 투덜거리면서도 마법사를 도와주는 게 츤데레다. 이 동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꽤 매력적이다.

서리의 공격으로 손끝도 못 움직일 정도로 얼어버린 마법사는 틈새를 찾는다.

살아감에 있어 완벽한 삶을 동경한다. 하지만 어디든 빈틈이 보이기 마련이다. 빈틈이 있어야 그래도 사람 살아가는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나 할까?

아이들이 나타나자 그 온기에 바닥이 녹고 서리를 눌렀다.



녹아서 땅속으로 스며든 서리 덕에 씨앗들이 싹을 틔울 거예요. 잎을 내고 꽃을 피워 봄을 누리겠지요. 물이 되어 기억을 잃었을 뿐, 당신은 해마다 그렇게 했을 거예요. 꽃과 함께 봄을 만났을 거고요.


서리는 마법사를 믿어 보기로 하고 떠난다. 사서가 쫓아와 종이를 체포(?)하는데 알고 보니 도서관에서 도망 나온 책이었다. 스스로 내용을 짓는 책. 읽다 보면 영영 안 끝나는 책. 제목이 없는 책.

그때 마법사가 이름을 지어준다. '아자차카타파하'라고. 와. 귀여워.

'가나다라마바사'가 지어준 '아자차카타파하'.

발음이 비슷한 '아주 착한 타파하'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초정리편지>가 한글에 대한 역사동화라면 <가느다란 마법사와 아주 착한 타파하>는 한글에 대한 판타지 동화라고 볼 수 있다. 전자가 단밤 같은 동화라면 후자는 츄파춥스 같은 동화다.

동화를 쓰는 작가들은 또 다른 세계가 있나 보다. 소설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김혜진이라는 작가를 너무 늦게 알아서 아쉬울 정도로 좋은 작품이 많아서 한동안 작가파기를 하게 될 듯하다. 

가늘고 길게 동화를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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