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나무야

유머

by 이제월




슬픔과 기쁨을 오가는 페이소스(pathos), 파토스(πάθος)는

‘겪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겪는 데서부터 이는 연민과 공감을, 수난(受難)을 나타내기도 하고

동시에 ‘열정’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피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20세기 버전이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생의 장면들은

보는 순간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다가가다 마침내 나-와-너를 가르는 ‘경계’, ‘선’을 넘는 순간

그래서 더는 남일이 아니게 바라보는 순간

짙은 슬픔을 건네줍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은 빈말이 아닙니다.


저는 지성의 증거로, 또한 성숙의 증거로 유머(humour)를 들고 싶습니다.

유머는 자신을 풍자하는 능력입니다.

남을 비꼬고 놀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능력이지요.

그러나 그게 지나쳐 비하(卑下)로 읽히면

누구도 웃지 못하고 불쾌하고 불편해집니다.

이 선이 더 나아가면 차라리 그 비하가 저이의 비천함 때문이다, 깔보고 함부로 하는 게 당연하다는

정당화로 넘어갑니다.

과학적 정당화의 사례로 인종주의와 그에 따른 탄압과 약탈 그리고 학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머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상대와 나 사이의 문턱을 낮추어 웃을 수 있게 하되

그게 지나쳐 나를 침해하거나,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해치는 느낌이 들어 불편해지지 않아야 — 다시 말해 웃기는 척 그를 공격하는 꼴이 되지 않기 위해 줄타기를 해야 하니까요.


그럼에도 이 재능은 자신과 주변에 너무나 유익한 재능이기 때문에

길러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정직함과 긍정, 세상—타자에 대한 신뢰가 동시에 필요한 재능입니다.

그 원료를 통해서만 유머를 작동하는 엔진이 움직입니다.


그리고 유머를 자아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뛰어난 감수성과 지성을, 탁월한 sense and sensiblility를 입증하는 게 될 것입니다.

유머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감각과 지성을, 감성을 모두 섬세하게 다듬고 유연하게 활동케 하는 훈련입니다.

내가 나에 대해 이해하고 장악하고, 믿고 따르게 만들어 줍니다.

세계와 나 사이에 아주 건강한, 민감성과 강도와 탄력을 두루 갖춘 끈을 잇는 것입니다.

심장과 나머지 온몸에 대한 관계.


그대가 유머를 배우기를 바랍니다.

덩어리진 토막들을 배우란 게 아니라

순간순간 바라보는 거리를 조절하여

웃음을 터뜨리고, 얼마 후 공감을 끌어내게

각자의 삶이 더 풍성해지고

내가 사는 세상이 더 안전하고 풍요롭게 하는

그 ‘지적 감각’을 기르시라는 말입니다.


수고의 보상은

충만한 생의 감각으로

실시간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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