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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가, 다른가 — 존재의 일의성에 관한 생각

by 이제월



“우리는 같은가, 다른가.”




이 물음은 단순한 사회적 질문이 아니라 존재론의 심연으로 곧장 내려가는 질문입니다. 인간과 인간은 같은가, 인간과 자연은 같은가, 신과 인간은 같은가. 혹은 모든 존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만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에 따라 세계는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갖습니다.


철학의 전통은 이 문제를 세 가지 개념으로 사유해 왔습니다. 존재의 일의성(univocitas entis), 유비(analogia entis), 다의성(aequivocitas entis)입니다. 이 세 개념은 단순한 언어적 구분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근본적 선택입니다.


다의성은 말합니다. ‘존재’라는 말은 각 경우마다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고. 인간이 존재한다고 할 때와, 나무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리고 신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존재’는 공통의 내용을 가지지 않는다고. 이는 급진적 차이의 철학입니다. 존재는 단 하나의 공통 바탕을 가지지 않으며, 각 영역은 고유하고 단절되어 있습니다. 이 입장은 차이를 극대화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할 위험에 처합니다. ‘같음’은 환상이고, 모든 것은 서로 닿지 않는 고립된 섬이 됩니다.


유비는 그 중간에 서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은 신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유비를 제안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할 때와 인간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고. 비슷하지만 동일하지 않고, 닮았지만 격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가 말해진다고. 이는 존재의 위계를 인정합니다. 신은 충만한 존재이고, 피조물은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유비는 차이와 연속성을 동시에 보존하려는 섬세한 사유입니다. 다만 이 구조 안에서는 언제나 근본적 비대칭이 남습니다. 우리는 궁극적 근원과 결코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 일의성은 과감합니다. 존재는 하나의 동일한 의미로 말해진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으로 둔스 스코투스가 이 입장을 체계화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할 때와 인간이 존재한다고 할 때, ‘존재한다’는 말은 최소한 하나의 공통된 개념을 갖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의성은 존재의 개념을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통일합니다. 차이는 존재의 ‘강도’나 ‘양태’에서 발생할 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서는 공통 기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입장은 단순히 신학적 논쟁을 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타자와 어떻게 관계 맺는가, 심지어 정치와 윤리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다의성의 세계에서는 타자는 근본적으로 이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단지 병렬적으로 나란히 있을 뿐입니다. 유비의 세계에서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지만, 언제나 등급과 위계의 구조가 개입합니다. 일의성의 세계에서는 최소한의 공통장이 전제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평면을 공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의성이 차이를 삭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차이를 더 정밀하게 설명합니다. 공통 기반이 없으면 차이는 비교 불가능한 단절이 됩니다. 그러나 공통 기반 위에서의 차이는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차이입니다. 일의성은 동일성의 강요가 아니라, 비교 가능성과 대화 가능성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우리는 같은가, 다른가”라고 물을 때,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일의성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만약 전혀 공통의 기준이 없다면, ‘같음’과 ‘다름’이라는 판단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비교는 최소한의 동일성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라면, 차이를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의성은 단지 논리적 필요조건에 그치는가. 아니면 더 나아간 함의를 가지는가.


일의성은 존재의 평등성을 함축합니다.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모든 것은 같은 차원에 놓입니다. 강도와 능력, 복잡성과 의식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존재의 의미 자체는 분열되지 않습니다. 이는 윤리적 함의를 가집니다. 타자를 전적으로 타자로 밀어내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형이상학적 기반입니다. 우리는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 다르게 존재하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뜻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 입장을 선택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일의성은 신을 인간과 같은 평면으로 끌어내리는가? 혹은 인간을 신과 같은 평면으로 끌어올리는가? 이 질문은 고대부터 논쟁적이었습니다. 일의성이 지나치게 밀어붙여질 때, 존재의 질적 차이가 무시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중해야 합니다. 일의성은 ‘모두 똑같다’는 평면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라는 최소 개념을 가장 추상적이고 비어 있는 형태로 설정합니다. 그 위에서 각 존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실현됩니다. 존재는 하나의 의미를 갖지만, 실재는 다층적입니다. 일의성은 내용의 통일이 아니라 개념의 통일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일의성을 지지합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고, 심지어 신에 대해 말하려 한다면, 최소한의 공통 개념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언어는 붕괴합니다.


그러나 이 지지는 단지 논리적 계산의 결과만은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의 희망이 스며 있습니다.


우리가 같은 존재 의미를 공유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단절된 섬이 아니라는 희망을 줍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닿을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존재의 최종 구조를 실험실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칸트의 태도를 떠올립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이론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덕 이성은 신을 요청한다고 했습니다. 증명은 불가능하지만, 이성은 어떤 가설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이성의 구조에서 비롯되는 요청입니다.


존재의 일의성도 그와 유사한 위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확인할 수 없지만, 그것을 요청합니다. 그것 없이는 사유가 붕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의성은 단순한 가설인가, 신념인가.


나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모든 존재가 같은 의미의 존재를 공유한다는 희망.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존재의 바탕에서는 하나라는 희망. 이 희망은 경험적 데이터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감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최선의 선택입니다.




나는 이 희망에 건다, 나는 그러나 이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믿어지기 때문에.

그러나 그냥 믿는 것은 아니다, 이 믿음을 견지하는 건 내가 끊임없이 이 믿음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의심을 견딘다면 내가 믿는 것은 정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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