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세 단계. 별과 달과 해
#크레센도, 점증(漸增)
희망. 우리는 끊임없이 희망합니다. 때로 희망없기도 하지만 그것은 ‘희망없음’, 말하자면 ‘무’(無)로서 존재하지, 비존재(非存在)가 아닙니다. 절망하든 희망을 의심하든, 희망따위 품지 않든 우리는 ‘희망’이라는 그물에 걸려 있고, 그물코 하나하나가 인드라망처럼 서로를 비춥니다. 우리는 현란한 영상에서 무의미하다거나 무용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희망-없다,라고 할 수 있을 뿐, ○○-없다,라고 ‘희망’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에게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희망을 마주칩니다. 때로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배신감을 느끼면서까지 희망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존재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합니다.
그리고 희망은 크레센도, 점증하거나 디크레센도, 점감합니다. 또는 점점 빠르게, 점점 느리게,와 같은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곡은 주어졌고, 악상이나 연주를 지시하는 기호만 바뀔 뿐입니다. 산다는 것 또는 사람이라는 것에는 이미 ‘희망 위에 있다’, ‘희망-한다’라는 존재양식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정신으로서 우리 존재는 그렇습니다.
타로카드의 메이저 아르카나를 일곱 장씩 세 층으로 나눈 시스템에서 제3층이자 마지막 층은 초의식을 다루고, 초의식은 초개아(transpersonal) 특성을 지닙니다. 그것은 더는 개인적이지 않고, 개인의 경험과 일화에 매이지 않으며, 그보다는 의미를 경험합니다. 의미 경험은 인간 전체에 상관하고, 인생 자체에 상관하고, 나아가 세계를 해설하고 규명 또는 규정합니다. 기억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개인의 일화를 잃어 버릴 뿐, 의미를 기억하고 개념을 보존한다는 점은 언어나 언어가 담지하는 의미가 기억과는 또 다른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사실 일화(逸話, episode) 기억에 한해서라면 기억의 세부 내용은 일 년이면 절반 이상이 바뀐다는 것이 현대 의학이 관찰하여 얻은 결과입니다. 반면, 다른 기억을 보존해도 언어나 언어의 뜻은 잃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 상실과는 구분됩니다. 물론 언어를 잃어 버리는 것도 기억의 상실인 게 있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증세로서 기억을 상실하는 것과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뇌 손상으로 일화 기억을 상실하는 경우에는 미래를 상상하는 힘도 잃어 버립니다. 기억이라는 게 특정한 한 부위에서만 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연계해서 ‘회상’(回想, re-member, 다시 현재화함)하려면 필요한 어떤 기능을 상실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손상을 겪은 사람들은 미래를 거의 상상하지 못합니다. 사고로 뇌 손상을 겪은 어떤 이는 이렇게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라는 건 마치 빈 방에서 의자를 찾으라는 말처럼 들립니다”라고.
#별의 희망
타로 카드에서 악마의 권능에 뒤이어 곧바로 탑이 무너지고 나서, 폐허 위에는 The Star, <별>이 뜹니다. <별> 다음에는 The Moon, <달>이 뜨고, 그다음에 The Sun, <해>가 뜹니다. 저에게는 흥미롭고, 당신도 유의하기를 바라건대, 별들은 여럿이지만 정관사가 붙었습니다. 곧 사물로서의 ‘별’을 말한다기보다 별-존재, ‘별-임’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자기가 무너진 사람의 희망은 어떤 것일까요, 희망은 정체를 알 수 없는데 왠지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라이더 웨이트 덱에서 열일곱 번째 아르카나 <별>의 도안은 흥미롭게도 별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별은 쳐다도 안 보고 흐르는 물 혹은 호수에 물병으로 물을 붓고 있는, 어쩌면 하나 마나 한 일을 하고 있는 알몸의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어쩌면 별의 희망은 ‘믿음’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행하기만 하는 믿음. 발가벗은 인물은 감출 것이 없는 순수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유럽의 그림에서 알몸인 사람과 옷을 입은 사람이 함께 등장한다면 알몸인 사람은 성자를, 옷 입은 사람은 죄인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 정도의 알레고리는 당시에는 ‘탁자’가 무얼 가리키는지 통용되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상징이요 은유였습니다.
이 별의 희망은 주욱 자라서 제가 ‘타자의 언저리’라고 부르는 데 가 닿습니다. ‘별'이 주는 희망, ‘별'을 향해서 혹은 별을 좇아서 혹은 별과 함께 갖는 희망이란 이제 더는 타자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대신 내 존재의 경계가 허깨비가 아니고 실상인 까닭으로서, 다르게 말하자면 나를 나이게 하고, 나를 나로 존재케 해 주는, 내 존재가 의지하고 발생하는 자로서의 타자를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타자가 여전히 낯설고 알 수 없지만 경계(境界)에서 경계(警戒) 서기를 멈추고 국경을 환히 개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언뜻 내가 품는 것 같지만 이미 사회적입니다. 나는 사회적 개인입니다.
#달의 희망
달의 희망은 사뭇 다릅니다. 달은 자아와 변화무쌍한 변화를 나타냅니다. SF 작가로서 명망 높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주저 중 한 편은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원서 제목은 [The Moon is a Harsh Mistress]인데, mistress는 master의 여성형입니다. ‘여왕’이라고 옮겨도 되지만, 그건 차라리 은유이고, 은유가 지시하는 바가 별 혼란이 없으니까 직접 지시하는 쪽으로 의미가 확장된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 지배자는 스스로 경지에 오른 마스터, 고수(高手)입니다. 무엇의 고수일까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지만 어떤 천체보다도 밝게 밤하늘을 밝힙니다. 이렇게 거대한 위성을 달고 있는 행성은 거의 없다고도 합니다. 타로의 상징 체계에서 ‘달’에 대한 이런 정보가 뚜렷하게 알려진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건 비교적 현대의 지식이지요. 그래도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개량하면서는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도 발견했고, 이건 지구 아닌 다른 천체들도 위성을 갖는다, 심지어 여러 개를 갖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을 인식시켰습니다. 타로가 널리 퍼지던 때에는 이 정도 지식은 함께 퍼졌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달의 특징, 대표 인상, 다시 말해 사람들이 달에 대해 지닌 경험은 오래도록 오직 하나의 얼굴만을 비추고(자전속도와 공전속도가 같기 때문), 모든 별빛을 압도하는 커다랗고 둥글고 환한 빛, 그런데 외부 요건이 아니라(물론 오늘날 우리는 지구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을 알지만) 자체 규칙에 의해 차고 이지러지기를 반복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러한 달은 인간의 자아와 닮았습니다. 우리는 사회관계에서는 적당히 연기하며 내 성격의 일부를 연출하여 보여 줍니다. 타자를 경험할 때, 타자에게 경험시킬 때 인간 자아의 모습은 달의 한 면만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 그 차고 이지러짐, 이 변덕스러움과 불완전함, 불안정성은 우리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불안하게 느끼게 만들거나 거꾸로 자신을 매우 대단하고 불가해한 존재로 느끼게 합니다. 자기 자신의 화려함과 불완전성은 자존심과 열등감이 동기화하는 우리네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자신을 겪으면서도 차츰 자신 안에서 어떤 항상성을, 자기에게 갇히는 대신 자기를 새로 보고, 다른 하늘의 다른 달들을 생각할 수 있을 때, 심지어 새로운 타자의 언저리에 이릅니다. 곧 나와 서로 의존하는 존재(별의 희망은 이것을 발견하고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케 이끌었습니다)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나를 존재케 하고, 내 개성을 부여하는 것, 내 항상성의 뿌리, 나를 조명하는(illuminate), 나를 비추는 ‘절대 타자’, 철학에서 이르는 바 ‘대타자’(大他者)를 인식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학에서 대타자는 신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원천이지요. 그런가 하면 현대의 정신분석가이자 철학자 라캉은 타자를 대타자와 소타자로 구분하면서 소타자는 경험하는 현실하는 타자-들이고, 대타자는 ‘자아에 투영된 타자’ 곧, 상상계의 타자로서 기준이 되는 ‘남’, 세상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거나, 나도 남들처럼 살고 싶다 할 때의 그 타자입니다. 어느 쪽이건 우리가 거역할 수 없게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 존재 내부로 들어오는 점은 같다고 봅니다. 다만 저는 라캉 이전의 대타자 정의에 더 끌립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이어가기에는 그 편이 더 단순명료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까닭은 없습니다. 방금 ‘새로운 타자의 언저리'라고 불렀지만 그건 명명하기 전의 비유이고, 달의 희망이 데려다 주는 경계, 그곳의 더 적절한 이름은 '연금술의 지점’입니다. 우리는 달의 변덕을 넘고 희망을 건져 진짜로 남이 될 차비를 했습니다. 남이라고 할만큼 새로운 나, 다시 태어나는 연속과 불연속을 겸비한 어쨌든 ‘나’를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해의 희망
해의 희망은 별에도 담겨 있었고, 달에도 담겨 있었습니다. 해는 계속해서 자기 존재를 알려 왔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그리로 가건 말건 해는 항상 비추었습니다. 자기 에너지의 거의 전부를 우주의 진공에 쏟아 버리며 그치지 않고 다가왔습니다. 해의 희망은 완전히 다릅니다. 별은 자기 인생의 문제에서조차 소외된 채이고, 달은 자기에게 고립하고 고착된 상태에서라면, 기어코 별에서 달로 이끌고 마침내 자신에게로 이끈 것이 해입니다.
해는 문제의 바깥에 섭니다. 해는 세상 밖에서 세상 위로 내려 쪼입니다. 밖에 있지만 가장 내밀한 존재, 내부를 결정하고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해는 태풍과 비바람, 눈보라, 잔뜩 낀 구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해는 모든 조건들 위에 있어 흥얼거리고 즐거워합니다.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해에게는. 해는 무엇이어야 하지 않습니다. 해는 그저 그대로면 됩니다. 아무렇거나 해가 세상을 빚지, 세상이 해를 조금이라도 빚어 내지는 않습니다. 해는 Radiate, 방사(放射)하고 복사(輻射)합니다. 굳히 해가 할 일이 있다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해는 비로소 가 본 적 없는 지평으로 우리를 데려다 줍니다. 우리는 타자를 지양합니다. 타자는 나와 맞서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이미 나를 전부 선사한 존재, 나를 받아들인 존재입니다. 나는 타자에게 구속받는 대신 그저 나로 존재하고, 상대에게 반응하는 대신 본래의 나대로 상대에게 행합니다. 그리고 상대는 이미 낱낱이 흩어진 누군가, 무엇이 아니라 세계 전체입니다. ‘타자의 지양’, 우리는 이 지평선에서 세계 전체를 다시 세웁니다. 그러자니 <심판, Judgement>이 따르고, 심판 뒤에 다시 만난 <세계, The World>가 옵니다. 다른 이가 당신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재판정에서 의연하고, 무덤에서도 성한 몸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 그리고는 댄서(dancer), 춤꾼이 되어서 마구 춤출 것이고, 당신의 춤이 세상을 만든다기보다 당신의 춤, 진동이 바로 세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당신은 희망할 줄을 배워야 합니다. 그걸 알고 몸에 익혀야 당신은 하늘 밖의 하늘, 도가에서 말하는 천외천(天外天)을 맛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갓난아기, 엄마 뱃속에서 그것만을 전부로 경험하다가 비로소 자기로 독립하여 세계를 직접 만나는 처지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무궁한 신뢰로 충만해야 하고, 기쁨으로 빛나고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딱 아기처럼.
만약 당신이 자신의 현재를 묻기 위해 이 세 장의 아르카나를 뽑았다면 당신이 순풍에 돛을 단 듯 빠르고 빈틈없이 성장할 것을 뜻합니다. 셋 중 하나를 뽑았다 해도, 각 단계의 불완전함이 미비함과 실패를 뜻하기는커녕 더욱 더 희망적인 상태를 말해 줍니다. 당신은 경계하되, 안심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 장의 카드는 다른 어느 카드보다도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개방성, 다른 단계들과 중첩되고, 한 시도 빠짐없이 ‘외부’를 인식하는 것은 하늘을 향해 열린 땅, 볕과 비를 맞는 열린 세계가 당신 또는 당신을 감싼 세계임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벌써 눈치채셨는가 모르겠지만, 당신과 세계 사이의 구분이 없거나 없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카드들인 것입니다.
당신은 타자의 언저리에 머물다가 스스로 연금술의 지점에서 변용하여 타자를 지양하는 데 이릅니다. 당신과 당신의 이웃들은 성숙하게도 자유와 책임 사이에 아름다운 균형을 맛볼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비로소 심판받을 마음가짐을 가질 것이며, 시간이 허락한다면 걸맞는 몸가짐도 하십시오. 당신이 만끽하는 행복이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불행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채로 심판을 맞으면, 제아무리 혹독한 평가라도 당신을 비추는 지혜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당신은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과거에 매여 돌아보느라 소금기둥이 되는 대신 놀랍도록 새롭게 죽은 자신을 새로 난 자신, 돌아온 자신으로 바꿀 것입니다.
긴긴 이야기를 이렇게 맺겠습니다.
당신 자신이 되십시오. 더는 당신이 아님으로써, 당신 자신에게서 당신을 해방시키십시오.